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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Dec 09. 2022

헤어진 연인의 사진을 삭제하다

사진과 함께 사라진 과거

내가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한 건 대학생 때였다. 군대까지 다녀온 뒤였으니 첫 연애 시기가 약간 늦었던 감이 없지 않다. 그 이전에 여자와 담을 쌓고 지냈다거나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연애에 눈을 뜬 시기가 늦었던 이유로 그때는 주머니 사정을 탓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연애를 할 줄 모르는 내 탓이 컸던 것 같다. 내 서투른 방식도 좋다며 받아준 그녀는 같은 대학의 신입생으로, 나와의 만남이 그녀에게도 첫 연애였다. 내가 첫 직장에 들어간 뒤에도 얼마간 만남을 지속했으니,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우리는 연애 중에 한 번 헤어졌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한 상태로 취업에 번번이 낙방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여자 친구 또한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라 그 헤어짐은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슬픔에 잠긴 나는 집에 돌아와 가족들이 듣지 못하게 방문을 꼭 닫고 울곤 했었다 — 이십 대 중반의 나는 곧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1년 뒤 우리는 또 헤어져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완전한 이별이었다.


첫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몇 개월이 지나 지금의 와이프가 될 사람을 만났다. 그때까지도 전 여자 친구에 대한 내 마음은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채, 그녀의 사진들이 내 핸드폰 사진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이성은 그 사진들을 어서 불태워버리라고 재촉했지만, 어떤 미련에서인지 나는 그 사진들을 불속으로 던져 넣지 못 한 채 때때로 꺼내보곤 했다. 새 여자 친구도 별다른 말은 안 했기에 그 사진들은 계속해서 내 사진첩에 남게 됐다.


전 여자 친구의 사진을 모조리 삭제하기로 결심한 건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가 진지해졌을 때였다. 내 사진첩에서 새 여자 친구의 사진들이 전 여자 친구의 사진 위에 쌓여가는 게 껄끄러웠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선 그 사람과 사귄 시간의 배가 걸린다는 말에 따르면, 그 시점의 나는 이제 막 "잊기"를 시작한 단계였다. 사진들을 삭제한다고 잊힐 리가 없음에도, 나는 서둘러 사진첩의 오래된 부분을 비워냈다.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서 이별은 쉬운 편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났다. 전 여자 친구를 잊기 위해 필요했던 사귄 시간의 몇 배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사진들을 삭제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 돌이켜보니 그 사진들 속엔 나도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수년 전 첫 여자 친구와 연애하던 내 과거가 없어진 것은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는 터라 그때의 풋풋했던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 거의 어김없이 전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그런 사진들을 삭제한 것은 결국 내 소중한 과거의 일부를 잘라냈던 것과 같았다.


죽도록 좋았다면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서로가 미치도록 싫어서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검열하듯 전 여자 친구에 대한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려 애썼고, 이제는 정말로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어린 시절 쓴 일기장도 아직까지 보관하는 내가 스스로 추억들을 내다 버린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것도 내 삶에서 처음 보고 느꼈던 수많은 감정이 담긴 소중한 기억들을. 사람 간의 관계, 특히 연애라는 게 결국 덧칠하는 그림 같은 거란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쉽게도 나는 그 미완의 그림을 영원히 기억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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