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LoL) 폐인 시절, 내가 만난 구한말의 영웅들
"이 글은 제가 한창 게임과 드라마에 몰입했던 시절, 소환사 협곡의 챔피언들과 구한말의 영웅들을 연결해 보았던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절 나의 밤은 낮보다 뜨거웠다. 모니터 너머 소환사 협곡의 포탑을 깨부수고, 넥서스를 향해 돌진하던 나는 지독한 '롤(LoL) 폐인'이었다. 칼바람의 긴장감 속에 살아가던 어느 날, 내 영혼의 틈새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불꽃이 튀어 들어왔다.
기묘한 일이었다. 분명 손가락은 마우스를 휘두르고 있는데, 내 머릿속엔 자꾸만 저무는 조선의 밤하늘이 겹쳐 보였다. 게임 속 챔피언들의 스킬 궤적 위로 드라마 속 인물들의 운명이 덧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붕 위를 소리 없이 가로지르던 고애신(케이틀린). 비단 치마를 휘날리며 장총을 고쳐 잡던 그녀의 눈빛은 정확히 적의 급소를 겨냥하는 케이틀린의 '비장의 한 발'과 닮아 있었다. 그녀에게 조선은 지켜야 할 '라인'이었고, 침략자들은 반드시 처단해야 할 '미니언' 그 이상이었다.
그 곁을 지키던 미 해군 장교 유진 초이(갱플랭크). 이방인의 옷을 입고 돌아온 그는 갱플랭크처럼 거칠고 고독했다. 바다를 건너온 그의 권총 소리는 협곡에 울려 퍼지는 포격 지원처럼 든든하면서도 슬펐다. 오렌지를 먹으며 고통을 견디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그는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농담 같은 사랑을 삼키며 버텨내고 있었다.
글로리 호텔의 안주인 **쿠도 히나(피오라)**는 가장 우아한 검사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는 피오라의 응수처럼 날카로웠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찌르기를 날리는 모습은 치명적이었다.
"조선의 밤을 뒤흔든 글로리 호텔의 거대한 폭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쿠도 히나(피오라)**의 솜씨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방인 장교 **유진 초이(갱플랭크)**가 몰래 깔아 둔 화약통을 그녀가 우아하게 찌르기로 터뜨린 것은 아니었을까? 소환사 협곡의 연쇄 폭발처럼, 그들의 운명도 그렇게 서로의 힘을 빌려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던 것이다."
반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다던 **김희성(트위스티드 페이트)**은 운명을 점치는 황금빛 카드를 든 채 방황했다. 그는 패를 섞으며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찾으려 애쓰던, 협곡의 가장 슬픈 도박사였다.
사랑은 때로 상대를 묶어두는 골드 카드가 아니라, 그녀가 날아갈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무용한 낭만이어야 한다. 김희성(트위스티드 페이트)이 끝내 골드 카드를 애신에게 던지지 않고 홀로 남겨진 것은, 소환사 협곡에서는 볼 수 없는 가장 멋진 '노쇼(No-show)'였다.
주막의 **장승구(그라가스)**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중심을 잡았다. 커다란 폭탄 대신 술통을 던지며 적진을 붕괴시키는 그라가스처럼,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배치기) 제자 애신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처럼 나타나 모든 것을 베어 넘기던 구동매(야스오).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며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건 그의 뒷모습에선 야스오의 고독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들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솟구칠 때,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소환사 협곡의 '5인 궁'은 약과였다. 제 몸 하나 부서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생의 마지막 칼날을 휘두르는 그의 최후는 협곡의 그 어떤 화려한 기술보다 처절하고도 눈부신 '최후의 숨결'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롤에 미쳐 살던 그 유치하고도 치열했던 시간이, 훗날 내 글의 자양분이 될 줄은. 마우스를 클릭하던 손가락의 감각은 이제 키보드를 두드리는 문장의 타격감으로 변했다.
게임 속 챔피언들이 죽고 나면 다시 '부활'하듯,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그 영웅들도 내 기억 속에서 캐릭터의 옷을 입고 다시 살아 숨 쉰다.
지금의 나는 소환사 협곡 대신 하얀 모니터 화면이라는 새로운 전장에 서 있다. 그때의 케이틀린처럼 정교하게 단어를 고르고, 유진 초이처럼 묵직하게 진심을 쏘아 올린다. 멍 자국 같은 승패 대신, 누군가의 가슴에 문신처럼 남을 문장을 쓰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글이라는 이름의 'Q스킬'을 충전한다.
"궁은 필요할 때만 쓴다."
"글쓰기, 그게 무엇이오?"
"총 쏘는 것보다 어렵고, 칼 휘두르는 것보다 고통스럽지만,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오.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아름답소."
"그렇다면, 우리 상(想)할까요? 당신의 영혼에 내 문신을 새기고, 내 문장에 당신의 숨결을 담는 그 위험하고 찬란한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