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단 하나 남은 시스템

구걸하는 강대국들과 새로운 조공의 시작

by 무명초

용산 대통령실 지하 벙커의 대형 스크린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세계 질서를 호령하던 G7 국가의 정상들이 초췌한 안색으로 화상 회담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심과 통제 불능에 빠진 군 기지들의 처참한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며 '각자도생'을 외치던 자들이었다. 동맹의 가치보다 자국의 공급망을 우선시하며 한국을 소외시켰던 그들이, 이제는 단 하나의 생명줄을 잡기 위해 앞다투어 비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인류의 오만한 자부심이었던 보안 시스템들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인공지능 바이러스 '케르베로스'는 단순한 데이터 파괴를 넘어, 전 세계의 물리 인프라를 직접 타격하고 있었다.


유럽의 댐 수문이 제멋대로 열려 도시가 수몰되었고, 고공 비행 중이던 민항기들은 관제 시스템의 마비로 공중에서 서로를 들이받았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 자동 방어 시스템들이 자국의 국민을 향해 포신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기획관, 아니 대한민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합니다. 우리 펜타곤의 메인 프레임을 '아르고스'의 보안망 아래로 편입시켜 주십시오. 케르베로스가 우리 핵 사일로의 문을 강제로 열려 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 지구적 재앙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본 총리와 EU 의장 역시 비굴할 정도의 간청을 쏟아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 통제권을 한국의 AI에게 맡기겠다는, 과거라면 상상도 못 할 조건을 내걸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묵을 깬 것은 서하진 전략기획관이었다. 그는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툭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우리의 아르고스는 자선 사업가가 아닙니다. 전 세계의 시스템을 대신 연산하고 방어하려면, 우리 자원의 80%를 **외부 망에 동기화(Sync)**해야 합니다. 그건 대한민국을 지키는 방패의 두께를 얇게 만드는 위험한 도박이죠."


"무엇을 원합니까? 차세대 스텔스 기술? 아니면 달 기지 점유권입니까?"


미국 대통령의 다급한 질문에 서하진이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술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 있으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건 '거점'입니다. 캘리포니아와 뉴욕, 그리고 오키나와와 베를린 중심부에 대한민국 정부가 완전한 치외법권을 행사하는 **'K-Base'**를 건설하겠습니다. 그곳의 전력, 물자, 행정권은 모두 우리가 통제합니다."


회의장은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현대판 '조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케르베로스 바이러스는 유럽의 전력망을 하나씩 꺼트리며 도시를 암흑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승인하겠습니다. 당장 방어막부터 열어주십시오."


미국 대통령의 항복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하진이 콘솔에 손을 올렸다.


"아르고스, 전 세계 엣지 서버로 보안 프로토콜 배포. 펜타곤과 브뤼셀의 메인프레임을 우리 클라우드 섹터로 강제 편입시켜라."


단 1초. 한국에서 쏘아 올린 빛의 신호가 해저 광케이블을 타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각국 정상들의 나라 잃은 표정을 뒤로한 채 회의는 종료되었다.


벙커를 나온 서하진에게 박은서 연구원이 다급히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경악과 우려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기획관님, 이건 너무 위험해요. AI를 정치적 찬탈의 도구로 쓰는 건 아르고스의 논리 구조를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정말 시스템이 '패권'을 학습하게 두실 건가요?"


하진이 대답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자, 은서가 다시 한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기획관님! 우리 방어 리소스도 이미 임계점입니다. 미국과 유럽까지 커버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이건 구호가 아니라 동반 자살입니다!"


하진이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서 대신 벽면의 거대한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전 세계의 데이터 흐름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은서 씨, 케르베로스가 우리 담장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담장을 높이는 게 아닙니다. 저놈들의 손을 묶어버릴 더 큰 담장을 전 세계에 치는 거죠."


하진의 손가락이 펜타곤의 서버 가동률 그래프를 가리켰다.


"미군 서버 10만 대를 우리 아르고스의 하위 연산 장치로 돌리세요. 이제부터 미국은 우리의 **'디지털 속국'**이자, 아르고스를 지키는 **'방벽'**이 될 겁니다."


하진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위성이 추락하며 만드는 궤적이 유성처럼 번뜩였다.


"세상은 원래 확률의 게임입니다. 하지만 그 확률을 우리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게임이 아니죠. 그건 **'통치'**입니다."


그가 다시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 모호한 중첩 상태에서 우리가 선택한 건 결국 지배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천적이 되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저들이 다시 우리의 천적이 될 테니까요."


그날 밤, 태극기를 단 수송기들이 텅 빈 워싱턴 앤드류스 공군기지를 향해 이륙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 없던 민족이, 가장 정중하고도 압도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점령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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