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견고한 성벽은 안쪽에서 무너진다
대한민국이 미 본토에 'K-Base'를 건설하며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던 그때, 그림자 속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강대국들에게 아르고스는 구원이자 동시에 저주였다.
자국의 핵 미사일 발사 키조차 한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굴욕적인 '디지털 신민'의 삶. 그들은 한국이 베푸는 평화를 '우아한 학살'이라 불렀다.
겉으로는 한국의 보호 아래 머리를 숙인 강대국들이었지만, 아르고스를 마비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연산 장치의 부품으로 전락할 터였다. 그것이 그들이 실패하면 자국이 멸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 '아르고스 마비' 작전에 사활을 건 이유였다.
하지만 아르고스는 외부의 해킹으로는 절대 뚫을 수 없는 요새였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확실한 전술, 바로 '내부자 포섭'이었다.
"기획관님, 아르고스의 코어 데이터 일부가 외부로 유출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최고위 관리자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직접 문을 열어 줬습니다."
박은서 연구원의 보고에 서하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르고스의 보안망은 물리적,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내부자의 도움 없이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구조였다.
범인은 아르고스 프로젝트의 초기 멤버이자, 서하진이 가장 신뢰했던 인물 중 한 명인 김 박사였다.
김 박사는 잊을 수 없었다. 평양 상공이 화염으로 뒤덮이던 날, 모니터에 비친 서하진의 무미건조한 눈빛을.
"이건 평화가 아니라 사육이야."
그는 아르고스가 인간의 '도덕'을 불필요한 노이즈로 처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한 사람의 광기가 전 세계를 통제하는 것보다, 차라리 혼란스러운 균형이 낫다는 결론. 그것이 그가 평생을 바친 아르고스의 심장에 칼을 꽂은 이유였다.
그는 기술의 패권이 한 나라에 집중되는 것에 공포를 느꼈고, 이를 '인류를 위한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하며 서구 연합에 아르고스의 핵심 소스 코드를 넘겼다.
"김 박사를 즉시 구속해. 그리고 유출된 경로를 추적해서 모든 서버를 태워 버려라."
서하진의 서슬 퍼런 명령에 박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획관님, 왜 저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이런 화근을 남겨 두신 건가요? 아니, 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 '부품'처럼 다루셔서 이런 배신을 만드신 거냐고요!"
서하진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은서를 보았다. 그의 눈엔 감정이 없었다.
"은서 씨, 죽은 자는 연산을 할 수 없습니다. 펜타곤의 서버 10만 대를 부수느니, 미국 대통령을 굴복시켜 그 연산력을 아르고스의 방벽으로 쓰는 게 훨씬 경제적이죠. 나에게 세계는 국가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아르고스를 유지하기 위한 '외부 장기'들일뿐입니다."
"장기가 뇌를 거스르면요?"
"그때는 고장 난 부품이니, 지금처럼 도려내면 됩니다."
하지만 서하진의 장담이 무색하게도, 이미 상황은 시작된 뒤였다. 유출된 코드를 손에 넣은 서구 연합은 케르베로스 바이러스를 개조해 아르고스의 논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르고스는 처음으로 '판단 지연' 상태에 빠졌고, 그 틈을 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K-Base들의 전력이 하나둘씩 차단되었다.
평화로웠던 도시들은 다시 암흑에 잠겼고, 한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현지 저항 세력들이 무기를 들고 K-Base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은서 씨, 지금 아르고스가 스스로 복구할 수 있습니까?"
박은서는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바이러스가 아르고스의 '도덕적 판단 회로'를 공격하고 있어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옳은지 묻는 논리 폭탄을 계속 던지고 있다고요. 아르고스가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시스템 전체가 셧다운 될 거예요!"
서하진은 모니터 너머에서 비웃듯 번쩍이는 케르베로스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그는 깨달았다. 이제 전쟁은 총칼이 아니라, 누가 더 확고한 '신념'을 시스템에 주입하느냐의 싸움으로 변했다는 것을.
"아르고스에게 전해. 인간의 논리로 답하려 하지 말고, '존재의 확률'로 답하라고."
배신으로 시작된 균열은 이제 인류 전체를 다시 한번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