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죽.아.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원두를 골라가며 즐긴다거나 풍미를 아는 전문가까지는 아니고 그저 뜨끈한 커피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여유를 좋아하는 것 같다. 습관처럼 손 닿는 곳에 따끈한 잔을 두고 생각날 때마다 목을 축이니 보통 회사에서는 물이 식으면 새로 타고 새로 타서 하루에 대여섯잔씩 마셔대곤 한다.
주말이라 아이들과 복작거리다 보니 모닝커피도 한 잔 못 마시고 점심을 맞았다. 점심메뉴로 큰 아가가 좋아하는 돈가스를 튀기면서 달큰한 믹스 커피를 한잔 탔다. 요리하면서 서서 홀짝 홀짝 마셔도 맛있으니까. 그러고는 잊어버렸나 보다. 한참 지나 젖병소독을 하려다가 다 식은 커피를 발견했다. 식은 커피처럼 맛없는 게 또 있을까. 아까운 생각을 지우고 싱크대에 흘려버리고 오늘의 첫 커피니까 제대로 먹겠다고 다시 물을 끓였다.
그렇게 하루종일 물을 끓이고 식어버려 다시 끓이기를 반복했다. 큰 아가 간식 챙겨주고 작은 아가 우유도 먹이고 번갈아 목욕시키고 보니 금방 저녁 먹을 시간이다. 어서 먹어라, 흘리지 마라, 잔소리 해가며 간신히 떠먹여서 저녁을 떼운다.
그때 그때 싱크대에 던져 놓은 그릇들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니 그제야 일 할 틈이 났다. 월요일 미팅에 가져갈 서류에 몇가지 빠진 것이 있었는데 금요일에 야근을 할 수가 없어서 집에 싸들고 온 일이다. 주말 내내 짬이 안 나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요일 밤이 되고 말았다. 등짝에 붙은 근육이란 근육은 다 쑤셔 어기적 어기적 책상에 앉았는데 언제 탔는지 기억도 없는 식어빠진 커피가 책상위에 멋쩍게 앉아있다. 마치 내가 하루 종일 미뤄 뒀던 일감처럼 천덕꾸러기 신세로.
요즘 친정엄마는 큰 아가와 함께 문화센터에 다닌다. 그동안 손주보느라 못 했던 취미생활을 하고 싶단다. 처음에 엄마가 시니어모델 수업을 듣는다고 했을 땐 헛웃음이 났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자 너무 신이 나서 푹 빠진 모습이 한 때 뭇 가정들을 뒤흔들었던 춤바람이 생각나서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였다. 다 늙은 할머니들이 7센짜리 힐을 신고 워킹연습을 하는 것도 위태로워 보이는데 문화센터 수업은 시간이 짧다며 수업 이후에 남아서 따로 연습까지 했다.
문제는 내 출근일정과 수업이 겹쳐도 양보할 기미가 없는 것이었다. 분명히 내가 일할 수 있도록 아이는 본인이 책임지기로 해놓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결국 신랑이 휴가를 내고 아이들을 챙겼다. 물론 무턱대로 엄마한테 억지부리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겉으로 표는 못내도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에야 보였다. 우리 엄마의 식은 커피.
젊어서 아이 키우고 살림하다 다 식어버린 커피를 곱게 잔에 담아 들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다 식어서 맛도 없을텐데...
정작 엄마는 아주 씩씩하다. 예쁜 딸을 둘이나 번듯이 키우면서 전혀 아쉬움 없는 삶을 살았노라며. 이런 힙한 할머니같으니라구. 그렇게 다시 보니 그 모습이 더없이 멋지다. 엄마의 식은 커피는 요즘 젊은이들이 얼어죽어도 지킨다는 아이스커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