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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낢 Jun 06. 2023

직장에서 존중받는 법


MZ세대는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신입사원과 일하기가 가장 어렵다. 쉽게 사고치고 쉽게 상처받고 혼자 토라지는 건 비슷하건만 최근 들어 더 어렵다고 느끼는것이 해가 갈 수록 신입사원과 나이차이가 벌어지면서 그들의 사회적 감수성을 못 따라가는 탓인 것 같다. 열살 쯤 차이날 때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반쯤은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는데 스무살 가까이 차이가 벌어지니 이제는 ‘그 친구 대하기 불편해’ 가 솔직한 감정이 되었다. 가끔은 아주 거북할 정도로 무례해서 내가 사장인 걸 잊었나 싶을 때도 있다. 반면 직장인 70%가 직장내 갑질을 당해봤다는 것을 보면 반대쪽도 적잖은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사이가 이렇게 멀어진 이유가 뭘까.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부터

기획팀이 모여서 지난 프로젝트 랩업미팅을 하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미팅을 시작도 안 했는데 30대 총괄PM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앉아있고 함께 준비하던 막내팀원은 커피텀블러를 들고 여유있게 미팅에 들어왔다. ‘간단하게 프로젝트 브리핑하고 다음번에 참고하면 좋을만한 의견 나눠볼까?’ PM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음 번에는 제작믈도 더 꼼꼼히 챙기겠다, 다음엔 사전답사를 더 철처하게 하겠다. 다음엔 차선책도 준비하겠다 등 연신 자기 실수들과 현장 리스크들을 짚어냈다. 반면 막내팀원은 거침없이 인력운영이 미숙했다. 시간관리가 아쉬웠다 등의 날 것의 피드백을 쏟아냈다. 성격의 차이도 분명히 있겠지만 사장이 주도하는 회의에서 본인의 의견을 말하기 조심스럽고 불편한 것이 직장생활 5년차쯤 되는 보통의 중간급 직원들이라면 물었으니 답한다는 마인드로 조별과제발표하듯 당당한 태도가 요즘 당찬 친구들의 모습이다. (분명 성격차가 있다. 정반대로 ‘에? 저요? 제가 뭘 알죠?‘ 하는 어린양도 있다.) PM이 난처해지지 않을까, 잘못된 의견이 아닐까 고민하는 모습은 없다. 물론 그런 모습이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하지만 요즘은 그맘때의 내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성장하는 동안은 자기가 아는만큼만 볼 수 있다. 그때의 나라면 무안을 주면서 미숙함을 나무라고 부족함을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더 많이 더 넓게 보도록 이끌어주는 리더를 더 믿고 따랐을 것이다. 노련하게 선배노릇하는 법을 연구하게 되는 이유다.


상대방 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면 이야기해 줘야할까 말아야할까.

MZ세대의 답은 아래 통계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을 듯 하다. 이상적인 직장상사의 조건으로 절반 가까이의 인원이 명확한 피드백을 꼽았는데 이들이 얼마나 효율성과 솔직함을 중시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성격좋은 얼굴로 ‘제가 식사 후에 거울을 못 봤네요,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라며 넌지시 무안하지 않게 신호를 보내는 옛스러운 조심성이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이들도 본인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말을 중간에 자르는 등의 효율성에 근거한 무례함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떼‘밈으로 진부함에 돌직구를 던지고 농담이 부적절하다며 정색하고 얼굴 찌푸리는 무례함을 너그러운 꼰대들은 ‘새내기의 패기’로 꾸역꾸역 포장해 준다. ‘제 앞니에 불이 붙었네요, 껄껄’ 하면서 속으로 나도 있었구나 실수할 뻔 했다 쓸어내리던 옛스러운 조심성으로.

배려가 먼저

우리 때는 ‘탈무드 이야기’가 초등 필독도서였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 탈무드 이야기에 두 형제가 농사를 지어 추수한 작물을 똑같이 반으로 나누어 가졌으나 형님은 곧 장가갈 아우가 걱정되어 본인 몫의 일부를 몰래 아우 창고에 날라다 놓고 아우는 식구 많은 형님이 걱정되어 자기 몫의 일부를 형님 창고에 가져다 날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정과 우애와 사랑이 그렇듯 존중과 존경도 감정교류를 통해 싹튼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서로 스스로를 생각하기에 앞서 상대편을 먼저 생각해야 발전적인 액션플랜을 짤 수 있다. 사회적으로, 특히 조직에서 존중하는 관계는 서로의 영역을 지키고 선을 넘지 않는 기계적인 규범적 정의를 넘어서야 의미가 있다. 결혼하지 않은 아우는 식구가 없으니 식량이 덜 필요하다는 논리를 떠나 앞으로 장가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거니 미리 배려하는 센스부터


내 안에 있는 것들

두 엄마가 찾아와 아이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 우기자 솔로몬이 잔말 말고 아이를 반으로 갈라 가져라 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아이의 친엄마가 기겁하며 자기가 포기할테니 아이를 살려주십사 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전통적 사고방식에서의 진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아니, 아주 다르다. 원래 내 것이었고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하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남으로부터 쟁취해야한다고 믿는 것 같다. 우리의 존엄성과 인간으로서의 품위같은 것은 자라가 용궁까지 업어간 토끼 간과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엄마가 친엄마임을 알게 되는 순간은 죽기살기로 친권을 주장하며 상대편을 헐뜯고 스스로를 입증하는 순간이 아니다.  친모만 가질 수 있는 무조건적인 모성애가 보이는 더 짧고 숭고한 순간이다. 그러므로 존중받고 싶다면 남의 간 걱정할 시간이 본인 간 건강을 챙기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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