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너지
습관적으로 늘 푸념과 짜증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십견 오려나 나 요즘 어깨가 너무 결린다.’, ‘오늘따라 되게 지치네.’ 아직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이미 피곤이 몰려온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누가봐도 도드라지게 어려운 상황에 있거나 실제로 곤란한 지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형편이 좋은 경우가 많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더 화가 나게 만든다. 그저 지나갈 법한 일들에도 잊지 않고 화를 내며 아주 작고 사소한 상처를 크나큰 비극으로 부풀려 주변에 하소연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보통은 아주 친한 친구이다.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자질구레한 일상 파편들도 속없이 이야기하는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가 있다. 관계가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애써 부정적 대화거리를 꺼내는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평균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정도의 개인적 불평이라면 대화의 수위조절도 없이 내뱉을 만큼 막역한 사이일 것이다. 우리는 친구의 하소연에 불편감을 느낀다.
공감능력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누구의 공감능력이 문제일까. 타인의 불행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청자가 문제일까,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가 공감되지 못 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 하는 화자의 문제일까. 대부분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상당히 까다롭다. 대국민 모금캠페인에 등장할만큼 큰 불행이 아니고서는 친구가 아니라 가족에게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사기 쉽지 않다. 첫사랑과의 이별을 기억하는가.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던 며칠, 몇주의 깊은 슬픔은 더러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청춘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는 얼마 안 가 첫사랑의 친구와 사귀고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한다. 이 두 부류는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고 위와 같은 문제를 겪곤한다.
관계도 자란다.
그러나 첫사랑을 열두번쯤 했을 나이가 되면 관계는 자라야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자신을 나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벚꽃캠퍼스를 떠나면 세상은 이미 아름답지 않다. 모든 일이 낯설고 두려웠던 시절에는 서로에게 기대고 위로하며 겨울을 난다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불혹이된 지금은 어떤가. 서로의 상황을 배려한다면 나의 작은 불행들을 불평하는 일에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전세집에 사는 친구 앞에서 세입자가 집을 비워주지 않아 매매가 안 된다며 하소연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이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면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불행의 시너지 효과
나의 작은 불행들을 일일이 불평하다 보면 모두가 자신의 불행을 꺼내 자랑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눈 일이 일어난다. ‘다들 아주 편하게 사는구나?’ 순식간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가장 처연한 여인으로 전락한다. 누구나 자기 불행이 가장 크고 위대하므로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믿을 수 없는 시너지를 내며 불행과 불평을 끝 모르고 피워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누군가는 대표 불평러를 위로한답시고 말을 거들테지만 모두의 감정선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동일하다. 불행을 벗삼아 불행의 사건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부디 그들과 깊은 대화를 삼가기 바란다. 끝까지 스스로의 감정을 긍정적인 상태로 지키며 그를 진심으로 위로할 자신이 없다면 당신의 의식을 흐트릴 불행의 늪은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느 지점에서든 그의 불행을 나의 작은 불행들과 견주기 시작했다면, 당신을 그의 상황에 대입하게 된다면, 당장 대화를 멈추고 경계하라. 어떤 성인도 불행앞에 객관적일 수 없으므로 상대가 불행보다 나의 작은 불행들이 더 크게 보일 것이다. 그 다음은 여러분도 수없이 경험했듯이 좌절하고, 분노하고 나의 작은 불행들에 대처할 의욕을 잃는다. 그렇게 불행이 내 삶을 잠식하는 것에 동참하기 원하는가.
가지치기
흔히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말로 '아니, 근데, 있잖아.' 를 꼽는다. 모두 화제를 전환 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화의 흐름을 끊고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려 자기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리고는 본인의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은 겸손을 미덕으로 하는 현대 사교문화에서 호감을 사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행을 자랑한다. 하지만 모두가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행을 가장한 자기 자랑과 자기 연민이 대화를 이끌며 대화가 길어지면 불쾌감이 피로처럼 쌓인다. 그렇다고 누구도 현재 우리 그룹의 불평러를 단죄할 수는 없다. 누구나 한번은 불평러인 적이 있었고 알지 못한 체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대의 짧은 맞장구로부터 시작된다. 불평러의 불행에 동조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대화의 주제를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다만 큰 주제를 전환하는 데에 집중하자. '자기불행 자랑대회'를 끝마칠 기가 막힌 주제를 찾자. 이를 알아차리고 나와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대화의 흐름을 바꾸기 쉽다.
봄이 가까웠다. 거리의 가로수를 따라 관용차량이 줄지어 서서 가지치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수고로움이 고마웠다. 한해 동안 자라나 무성하게 잎을 피웠던 잔 가지를 모두 쳐내고 새 가지를 기다린다. 훨씬 푸르고 싱그러운 잎이 가지런히 날 것이다. 오래 묵은 단톡방, 시간이 지난 관계는 대화의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식물은 손발이 없으니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을 기다릴테지만 우리는 자의지로 충분히 스스로 말의 가지를 쳐낼 수 있다. 벌써 첫사랑만 열두번도 넘게 한 우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