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들어 개인적으로 300일간의 도전을 계획한 것처럼 사업적으로도 꽤 도전적인 연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사업을 수행하면서 추가로 매월 한개 이상의 입찰에 참여하는 계획이다. 이 계획의 실효성을 위해 추가적인 리소스가 필요하겠지만 이와 무관하게 우리 조직은 도전과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근 시장의 변화로 비즈니스 영역을 확장 중인 우리에게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대외적으로 레퍼런스를 쌓기에도 좋고,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업무 영역에대한 경험치가 쌓이니 내실을 다지기에도 좋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1월 첫번째 과제는 신중하게 거르고 걸러서 우리가 가진 레퍼런스에 가장 부합하는 프로젝트에 도전했다. 우리 회사는 BTL 마케팅 중에도 오프라인 프로모션, 이벤트를 기반으로 하는 회사였다. 지난 8년간 매출의 90%가 오프라인, 행사였다. 물론 행사는 이벤트의 꽃으로 초청, 홍보, 디자인, 영상, 연출, 운영을 총망라하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팬데믹으로 사업구도가 급변하면서 우리는 자의반 타의 반으로 온라인, 영상 제작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행사를 통해 늘 접하던 일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영상과 온라인 중계에 대한 고객의 기대치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오프라인으로 전달하던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원했고 큰 무대와 관중을 위해 만들던 영상의 영상미와 연출효과는 무의미해졌다. 우리는 나름대로 고객의 요구에 맞는 기준점을 찾아냈고 팬데믹 위기 상황에 꽤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더 큰 기회를 맞았다고 표현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오프라인으로 고객을 직접 대하며 큰 그림을 그리던 기획자가 CRM 기획에 유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전에 어떻게 고객을 인게이지시키고 현장에서 어떻게 고객의 몰입을 설계할지,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까지 계산하는 것이 행사 기획자다. 그러니 이 단계를 영상 프로젝트로 치환하는 것은 오히려 시야를 좁혀서 풀어내는 격이라고 생각하니 접근이 쉬웠다. 더욱이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의 연출까지 컨트롤하는 습관이 남아서 제작사로서는 제안하기 어려운 영상에 이은 파생컨텐츠, 채널을 연계한 사전/사후 프로젝트까지 고객과 논의하다 보면 일이 술술 풀리곤 했다.
다만 기존 고객에 머물러서는 한계점에 부딪혔다. 기본적으로 행사보다 제작은 매출이 적었다. 물론 매출만으로 비즈니스 성과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출을 빼고 평가할 수도 없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해냈던 결과적으로 매출이 반토막 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카운트를 드라마틱하게 늘려야한다는 결론에 닿았고 아주 도전적인 과제에 모두가 적극 동의했다.
놀라운 사실은 과제가 주어지자 모두가 생기를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적의식이 생기자 전에 없이 주도적이고 적극적이었다. 1월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실망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1월 첫번째 비딩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수도없이 썼던 행사제안서처럼 우리만의 영상 기획 제안 스타일을 찾아야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누군가의 피드백이 아니라 우리 조직이 스스로 깨달은 사실이다.
이번 달에는 한발 더 나가서 도전 가능한 과제를 직원들이 스스로 찾았고 평가회를 거쳐 두 개의 비딩프로젝트를 선정했다. 그리고 나는 창업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핵심역할을 맡지 않았다. 스폰서로써 직원들을 독려하고 지지했지만 실제로 지휘봉을 들고 흔들지 않아도 직원들은 스스로 본인들의 역할을 찾고 서로 의지했다. 늘 개인의 인맥과 벤더계약에 의존하던 내 회사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생각한지 한달만에 실제로 현실이 된 것만 같았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잠자리에서 히죽거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직원들이 정성껏 작성한 서류를 나라장터 페이지에 업로드하기 위해 일찍 출근했다. 평소 디지털 문명과 가깝지 않을 뿐더러 정부입찰보다 기업프로젝트에 익숙했기 때문에 마감시간보다 서둘러 업로드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제안서 총책임인 직원과 나란히 앉아서 마치 선물포장지를 뜯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서류를 하나 하나 등록했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내가 입찰참가자격변경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순간 귓가에 전자음이 들렸고 손끝이 저렸다.
뭐라고?! 입찰이 처음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회사는 행사대행업을 주로 했기때문에 행사관련 입찰참가자격이 이미 등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매번 입찰 참여를 할 때 별도로 등록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영상제작사로 업종신고를 하고는 나라장터에 참가자격을 갱신하지 않은 것이다. 당장 신청해도 승인완료까지 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입찰등록 마감이 한시간 남은 상황이었다.
순전히 내 탓이였다.
직원들이 몇날 며칠 공들여 만든 제안서를 제출도 못하게 되다니. 눈물이 핑돌았다. 자괴감과 수치스러움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옆에 망연자실 앉아있는 기획팀장은 화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하나를 배우지 않았냐고 다독이며 이 일은 다른 직원들에게 함구하기로 했다.
사고는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생긴다. 배가 순항하는 날은 경치를 보며 넋을 놓고 내 몫을 다하지 않게 된다. 출근시각이 가까워 오자 직원들이 하나 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면목없는 얼굴로 하루 종일 내 방을 맴돌다가 일찍 퇴근했다.
빨리 내일이 오면 좋겠다.
유찰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