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오락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에 대해 적잖은 죄책감을 가진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는가 반문하며 어쩐지 그대로 잠에 빠져들기에는 아쉽고 허무한 기분이 된다. 그래서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거나 티브이 리모콘을 눌러대는 것이다. 어떻게든 오늘을 조금 더 채워볼 요량으로.
결론이 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미련을 부른다.
나는 주로 시리즈물보다는 단편영화를 선호하는 편이다. 시대를 가로지르는 대작들도 속편을 위해 기약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사절이다. 그 찜찜하고 불편한 기분을 견딜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여서 결론이 나기 전까지 모두를 못 살게 군다. 빨리 매듭짓고 싶어 안달이 나기 때문에 오히려 데드라인이 가까울 때 일이 더 잘 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프로젝트들은 상대가 무성의하게 느끼거나 스스로 빨리 질려버려서 크게 재미를 못 느낀다. 크리스마스 아침 선물 꾸러미가 너무 궁금해서 포장지를 마구잡이로 뜯어 젖히는 어린 아이처럼 게걸스럽게 일을 해치워서 알맞게 거슬리도록 가느다랗게 연결된 신경줄기를 끊어버려야 속이시원하다.
어찌보면 스트레스 상태를 못 견뎌하는 성격이다
짧은 데드라인을 선호하고 빠른 호흡으로 일하기를 즐긴다면 보통은 긴장상태를 잘 관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듯 해치운다는 것이 옳은 설명이다.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들은 침대머리에서도 머릿속을 맴돌며 오늘을 붙잡고 늘어진다. 여유롭게 내일을 기약하며 덮어두는 대인배가 되어야 더 큰 일을 할텐데. 라고 머릿속으로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마흔이 넘도록 굳어져 버렸다.
그렇게 밤잠을 설친다
아직 못 끝낸 고민들과 상념들이 돌림노래처럼 들려와서 뇌벽에 부딪힌다. 인생이 조금 더 단조롭던 시절에는 뭐든 머리 회전이 빨랐다. 관여하는 인자가 적기 때문에 변수도 적고 위험부담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인생의 등장인물들이 하나 둘 늘면서 복잡한 방정식이 되고 보니 그저 멀겋게 누워서 천장에 꼭지점을 그려서 완성하던 도면과는 차원이 다른 설계도를 그려야하는 지점에 닿고 말았다. 어릴 때는 세상을 모르기도 했고 스스로를 크게 탐구하지 않은 채로 인생을 살다보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 했었다. 그런데 머리도 무겁고 등에 진 짐도 한 가득인데 이제야 하고싶은 것, 할 수 있는 것들이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아이러니 하게도 스무살즈음에는 모두가 뭐가 하고싶으냐고 물었는데 막상 그 대답이 머릿속에 가득찬 지금은 아무도 물어주지 않는다. 아, 누가 묻기는 커녕 내가 자진해서 떠들어도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그래서, 어디에도 풀어놓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 갇혀서 시끄러워 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다음으로 미루기 때문이다
진짜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결정지은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젝트로 고민할 때는 이불을 코끝에 걸고 고민하다가도 결론이 생각나면 세상 모르고 잘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내일 결정한 그대로 실행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고민은 그럴지가 않다. 내일 아침 당장 실행할 수 없는 옵션들만 생각이 나니 답답함만 배가 될 뿐이다. 어찌어찌 생각난 결론들은 하나같이 망설여지는 옵션들뿐이니 결국 다시, 다시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딱 한가지만
오늘 밤 내 목표는 아주 소박하다. 내일 당장 할 수 있는 딱 한가지만 생각해내고 잠에 빠져드는 것. 어떤 변명도 없이 내일 아침에 반드시 할 수 있는 딱 한가지. 어짜피 인생은 논스톱 생방송이라 오늘밤 당장 결말을 낼 수도 없을 뿐더러 나같은 엑스트라 단역에게 주어지는 분량도 하찮기 그지 없으니까. 아, 혹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닌가 묻는 사람이 있는가? 맙소사 그대의 젊음에 건배라도 하고싶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꿈이다. 내가 꾸는 꿈이 바로 내 인생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내 꿈은 아이들, 부모님, 성공, 직장으로 가득해져서 진짜 나라는 존재는 단역배우만도 못한 신세가 된다. 이미 그 외의 것들의 서사가 너무 커졌기때문에 이제와 역전시키기는 어렵다. 나는 나의 꿈을 위해 존재하는 무대장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딱 한가지만. 내 꿈을 위해 나라는 단역배우가 할수 있는 딱 한 씬만 생각해 내자.
아주 신박한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