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변기까지 깨뜨렸던 북극발 한파가 가시고, 오늘은 온화한 소식으로 찾아왔습니다. 두 달 전에 의뢰했던 첫서재의 로고 디자인이 완성됐거든요.
로고를 만들어준 분은 같은 직장에서 저희 팀과 오래 작업을 해온 조한결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뉴스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는 탁월한 능력자지만, 로고 디자인은 대학 졸업한 뒤로는 손을 댄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전문업체를 뒤로 하고 의뢰를 드렸어요. 우선 ‘저마다의 서투름이 쌓여가는 공간’이고 싶다는 첫서재의 정체성을 살리고 싶었고요. 또 아무 인연이 없는 업체보다는 저를 알고 뜻에 공감해줄 분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로고를 완성해나가고 싶었거든요. 다행히 흔쾌히 응해주셔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로고를 설계할 때엔 ‘첫서재’를 상징할 만한 몇 가지 단어들을 떠올려봤어요.
‘처음 / 서투름 / 책 / 폐가 / 라일락 나무 / 아날로그’
흰 종이에 단어들을 적어두고는 상상의 붓으로 칠해봤습니다. 이 모든 걸 하나의 로고에 다 담으려면 지나치게 난잡한 이미지가 탄생하겠더군요. 디자이너께서 버릴 것은 버리라고 조언해주셨고, 그게 로고 만들기의 첫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버리는 것.
그다음은 여섯 개의 단어를 하나씩 버려보며 디자인을 조합해봤어요. 경우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수많은 디자인이 탄생했다 수정됐다 사라져 갔지요. 디자인에 무지한 저야 “이렇게 해보면 어때요? 저렇게 해보면요?”를 아이처럼 반복하면 그만이었지만, 제 궁금증에 따라 계속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거나 조합해야 하는 디자이너에겐 고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수차례 조합 끝에 ‘책, 서투름, 집, 아날로그’의 이미지를 담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색감과 글씨체를 고르고, 글씨로만 로고를 완성할지 상징 이미지를 넣을지 선택해야 했어요. 원고지 형태의 틀에 글씨만 새겨 넣어보기도 하고, 아예 글씨를 빼고 이미지만 남겨보기도 하면서요. 깔끔한 시각화와 복잡한 의미 전달 사이에서 핑퐁 게임을 반복한 끝에 여섯 개의 최종 후보가 남았고, 이틀 밤을 고민한 뒤 결정을 내렸습니다.
막상 만들고 보니 ‘이 단순한 이미지를 위해 이토록 오래 고민했던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렇지만 어떤 생각이든 궁극에 이르면 늘 간결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수년간 어지러이 쌓은 생각을 사각의 틀에 정갈하게 담아냈다는 후련함은 덤이었습니다. 간단히 로고의 의미를 말씀드려 볼게요.
먼저 하얀 바탕에 까만 글씨로 색감을 최대한 단순하게 통일했습니다. 화려함보다는 ‘편하게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60년 묵은 폐가를 고쳐 만든 가게인 만큼 오래된 집을 시각화해봤어요. 묵직한 세월을 닮은 무언가가 든든하게 지반을 받쳐주고, 그 위로 조그만 창이 나 있는 모습이 첫서재와 닮아 있지요. 지붕은 책 두 권을 펼쳐 겹쳐놓은 모양으로 완성해주셨어요. ‘책으로 덮인 집’이라는 느낌도 좋았지만, 두터운 윗책이 가냘픈 아랫책을 포근히 감싸주는 것만 같아 맘에 쏙 들었답니다.
이미지 전체로 봐도 두꺼운 선들이 가느다란 것들을 든든히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가 조화롭게 보였어요. 사람이 사유하는 과정과 닮아 있기도 하고, 감성과 이성, 불안과 안정이 어우러진 느낌이었거든요.
닮지 않았나요..?
글씨는 아날로그 공간의 의미를 살려 손글씨체를 골랐어요. 사실 같은 로고에 명조체를 입혔을 때 디자인 면에서는 더 낫더군요. 하지만 디자인의 완성도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서투름이 쌓이는’ 공간의 의미를 꼭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침 ‘손편지 쓰고 가면 커피값을 안 받겠다’고 선언까지 한 마당이니 손글씨체로 마음이 더 기울 수밖에요.
마지막으로, 눈썰미가 좋은 분은 벌써 발견하셨을 텐데요. 중간 글자인 ‘서’의 시옷이 뒤집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씩씩하고 말 안 듣는 아이(?)가 처음 한글을 배우며 시옷을 쓸 때 저렇게 긴 획을 반대로 쓰더군요. 그걸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어요. 아이의 첫 글씨처럼 서툴러도 설레는 공간이고 싶고, 어른이 시옷을 틀리게 써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싶어서요. 그 아이가 컸을 때 말해주면서 놀려먹기도 좋을 것 같았고요.
글씨만 쓴 버전, 가로 버전
로고를 완성하고 나니, 혹한에 수도꼭지처럼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로고를 만드는 과정은 조금 버겁고 많이 즐거웠어요. 사람과 하는 작업인데다 결과물도 눈앞에 바로바로 보이는 만큼, 셈법이 복잡한 다른 서류 업무들(세금, 등록, 신청서 작성 등등)에 비하면 행복한 작업이었지요. 다시 한번 멋진 로고를 만들어준 디자이너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네요.
로고까지 생긴 만큼, 다음 주에 올릴 글에는 정식으로 책 추천을 받아볼 생각입니다. 첫서재에 놓아둘 ‘처음노트’를 구독자분들과 미리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비록 얼굴을 맞대 본 적은 없을지라도, 책과 글에 관한 서로의 이야기를 읽고 감각한 사이인 만큼 구독자분들의 책 추천부터 먼저 받고 싶은 마음이랍니다. 그럼 다음 주 일요일에 또 글 쓰러 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