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Mar 07. 2021

39년 만의 탈서울

<춘천살이, 첫 2주의 기록>



2월 22일

 이삿날이다. 아침 7시가 막 넘은 무렵부터 바깥이 시끄러웠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우리집 때문이었다. ‘이삿짐센터 차량이 너무 일찍 왔다’며 경비아저씨께서 막아 세우고 있었다. 슬리퍼를 끌고 얼른 나가봤다.

“주민들 출근하기도 전인데 벌써 이사를 시작하면 어떡해요?”
“죄송해요. 저희가 강원도로 멀리 이사를 가느라 아침 일찍부터 짐을 싸야 해서요.”
“왜 강원도까지 가요?”
“뭐 다른 것 좀 하다 오려고요.”
“나도 고향이 강원도인데. 얼마 살다 와요?”
“한 2년이요.”

 ‘강원도’라는 말에 경비아저씨 화가 좀 누그러진 모양이다. 다행히 주차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다. 이삿날은 늘 그렇듯이 정신없이 바빴다.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어떻게 고속도로를 두 시간 달려 춘천에 도착했는지 온전히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 몽롱하게 하루가 갔다. 일은 이삿짐센터 분들이 다 하시는데 괜히 내가 더 지친 기분.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9시가 넘어서야 이삿짐을 다 옮겼다. 시끌벅적하던 집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대충 씻고는 서둘러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이 바뀌어 괜히 어색했지만, 낯섦보다 피로감이 더 컸는지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잠이 덮치기 전에 잠시 생각했다.

 서울이 아니구나, 여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 아닌 곳에서 나는 살아보게 되었구나.



2월 23일


 아침 일찍부터 ‘첫서재’로 향했다. 60년 묵은 폐가를 고쳐 만든 공유서재. 이곳에서 나의 스무 달 휴직이 열리고 닫힐 것이었다. 문 여는 날짜는 3월 21일로 결정했다. 그 사이 보수 공사를 마쳐야 한다. 할 게 참 많다. 땅 밑 누수된 곳은 없는지 살피고, 겨우내 써보지도 못하고 터진 정수필터와 변기도 교체하고,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틈이 갈라진 마당과 벽면도 새로 미장해야 했다. 지난가을 리모델링을 맡겼던 업체에서 이른 아침부터 와주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업체 분들이니 아마 새벽부터 달려오셨을 것이다.

“네? 아직 물이 안 나온다고요?”

 업체 담당자께서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물이 안 나오면 집수리가 불가능한데 해빙기를 가져오지 않으셨단다. 2주 전 공사 일정을 잡을 때 수도관이 얼어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지만, 설마 지금까지 녹지 않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다는 이유였다. 수도관 녹이는 데에만 꼬박 반나절은 걸릴 테니 오늘 공사는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다음 주중으로 다시 날짜를 잡았다. 나도 속이 터졌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그분들도 허탈할 것이었다.



2월 24일


 집에서는 이틀째 이삿짐 정리를 했다. 공간 구조가 바뀌니 정리의 법칙도 바뀌었다. 4년 만의 이사라 버려야 할 것들도 잔뜩 쌓였다. 놔둘 것, 버릴 것, 옮길 것을 분류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린 셈이다.

 성인이 된 이후 열 번째 이사. 이사란 늘 새로운 어딘가로 향하면서 동시에 옛날 어딘가로 나를 데려간다.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참 많은 옛날들이 바쁜 손길을 멈춰 세우는 탓이다. 서랍을 정리할 때가 특히 그렇다. 물건을 전부 꺼내놓으면, 잃어버린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들이 한꺼번에 덮쳐온다. 분명히 남겨둘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아무리 기억을 되감아봐도 떠오르지 않는 물건들이 많았다. 반면 이건 왜 남겨뒀을까 기억을 더듬다 보면 불현듯 원치 않는 추억까지 재생되기도 했다. 잃어버린 기억, 잊고 싶은 기억. 모두 나 없는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알 길은 없지만 조용히 빌어보았다. 내 서랍보다 큰 세상 속에서 다들 행복하게 살기를.



2월 25일


 새로 얻은 집은 첫서재에서 멀지 않다.

 30년 가까이 된 아파트인데 그동안 한 번도 새로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듯했다. 구하기 어려운 월세여서 계약 조건도 (세입자 입장에서는) 다소 불리하게 느껴졌다. 도배도, 장판도 새로 해주지 않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그렇대도 안방 유리창문은 깨져서 테이프로 붙여놓았고, 천장에 달린 전등 유리도 서너 개 금이 가 있어 위태롭게 보였다. 세탁실과 화장실 배수관에서는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방충망도 찢어져 있고 빨래 건조대도 망가져 있었다. 80세 다 되신 집주인께 수리를 요청드리려고 전화하니 ‘뭐라고? 잘 안 들려’만 반복하셨다. 결국 부동산을 통해 어느 정도 협의를 보았다. 유리창과 배수관 정도는 집주인 측에서 교체해주기로 했다. 철물점과 유리업자 분들이 차례로 집을 방문했다.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닌 곳.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꾸는 모습에 그래도 마음이 풀어졌다.



2월 26일

 첫서재의 북스테이, ‘첫, 다락’의 첫 예약자를 정하는 날이다. 3월에 두 분 밖에 받을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에 공지하지 않고 브런치에만 글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요청해주셨다. 내가 뭐라고 이분들을 떨어뜨리고 붙여야 하는지, 마음이 내내 편치 않았다. 고민 끝에 ‘4월부터는 선착순으로 받겠습니다’라고 공지글을 고쳤다. 그러다 선착순에 취약한 분들이 계실 거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착순이 기준이지만 한두 분 정도는 저희가 선정하겠습니다’라고 글귀를 다시 다듬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인데 누군가에겐 경쟁에서 탈락한 기분을 안겨줘야 한다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일단 지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겐 직접 찾아오시면 소정의 선물이라도 드리겠다고 메일을 보내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다.

 ‘첫, 작품’ 프로젝트는 더 꼬였다. 선정 기준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복잡한 세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수수료를 안 받겠다고 선언한 마당인데 부가가치세를 더 받고 작품을 팔아도 되는 걸까? 아니면 현금영수증 등 복잡한 문제를 창작자들한테 떠넘겨야 하나? 여기저기 조언을 구해봤지만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의견이 엇갈렸다. 오픈 날짜는 계속 다가오고 있다. 빨리 해결해야 할 텐데.



2월 27일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영상편집자의 결혼식 날이다. 덕분에 이사 온 이후 첫 서울 나들이를 했다. 40년 가까이 살아온 서울인데 향하는 기분이 생소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는 서울에 계신 부모님 댁에 잠시 들렀다. 부모님은 여전히 걱정이 많으시다.

“너 회사 그만둔 거 진짜 아니지?”
“휴직이라니까요. 걱정 마세요.”

 벌써 세 번째 오간 질문과 답이다. 속으로는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되뇌었다. ‘그만둔 게 아니라, 훗날 그만두거나 그만두어질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에요.’

 서울의 하늘은 평온했고 날씨는 춘천보다 따스했다.



2월 28일

 ‘탈서울’을 하고 맞이하는 첫 일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여러 준비로 아침부터 바빴다. 가게 간판을 고르고, 메뉴를 정하고, 커피 원두를 선정하느라 여기저기서 샘플을 주문했다. 사람들의 ‘첫 책’에 관한 사연을 담기로 약속한 ‘처음 노트’도 수제로 제작을 맡겼다. 별 거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해가 졌다. 아이와 축구 게임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이었다.



3월 1일

 3월의 첫새벽부터 세차게 비가 내렸다. 따스한 날씨에 이게 봄비인가, 3월이니 겨울비는 아니겠지,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비는 추위를 다시 데려왔고, 추위는 눈을 다시 데려왔다. 빗물이 점점 알갱이처럼 굵어질 무렵 첫서재에 일하러 나갔다. 도착할 즈음에는 어느새 설국이었다.

 눈 내리는 게 반갑지 않으면 어른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지난달까지 나는 어린아이였나 보다. 눈이 오면 귀찮아질 것들보다 마냥 아름다워질 풍경에 더 들떠 왔으니까. 그리고 오늘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며칠 뒤면 공사가 시작되는데 큰일이었다. 창고에서 넉가래를 꺼내온 뒤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에는 한껏 아름다워진 풍경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두었다. 가게 홍보용으로 필요할 것 같아서.

 결국 저녁까지 눈은 그치지 않았고, 제설작업을 내일로 미뤄야 했다. 내일이면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가 눈을 털어내고, 마당과 벤치와 집 앞 골목길까지 쓸어내야 한다. 왜 내가 살아오면서 눈을 귀찮아하기보다 아름다워했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내가 들뜬 사이 누군가는 귀찮아하며 치워내고 있었겠지.



3월 2일

 아이가 입학하는 날이다. 춘천살이보다, 첫서재보다 중요한 건 휴직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아이와 보내는 일이다. 나는 아침 등교 당번이다. 지 몸집만한 책가방을 멘 아이의 조막손을 잡고 학교 정문에 다다랐다. 혼자 교실로 향하는 뒷모습이 어찌나 작고 씩씩해 보이던지. 그 순간의 기분은 굳이 글로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 기억해낼 테니까.

 오후에는 첫 등교를 마친 아이의 조막손을 다시 잡고 첫서재로 향했다. 제설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는 혼자 골목을 누비다가 동네 친구를 찾아냈다. 서재에서 비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오래된 집들이 줄지어 있는데, 거기 살고 있던 한 살 어린 녀석이었다. 이름은 현표라고 했다. 두 아이는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친해졌다. 어느새 각자 집에서 각종 도구들을 실어 나르더니, 해가 지기 전에 기어코 골목길 어귀에 눈 왕국을 창조해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두 아이는 못내 아쉬워하며 내일 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지? 두 아이는 시계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갈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결국 둘은 이렇게 약속하더라. “내일 이 시간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3월 3일

 물이 나왔다!

 첫서재의 모든 수도꼭지가 꽁꽁 언 지 두 달 만이다. 마당 밑 깊게 파둔 수도 계량기의 꼭지를 돌리자 저 안쪽 어딘가에서 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자극하는 쾌감에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오늘이 바로 봄이 오는 날이로구나! 어제 미처 끝내지 못한 제설작업도 콧노래를 부르며 얼른 마무리했다. 어느새 점심이었다.

 오후에 가장 큰 과제는 제빙기 정수필터 교체 작업이었다. 겨우내 정수필터가 얼어서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유튜브 영상을 보니 30초면 끝나는 작업인데 나는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원래 똥손인데다 주요 부품이 파손돼 하나하나 동네 철물점에서 구해와야 했던 탓이다. 아마 숙련된 기술자가 와서 고쳐주었다면 금방 마무리지었을 것이다. 그 출장비를 아꼈다며 비숙련 노동의 시간을 위로했다. 내일은 온수기를 교체하는 날이다.



3월 4일

 드디어 공사업체 담당자께서 다시 첫서재에 왕림해주셨다. 공사 기간 내내 보던 분이었는데도 어찌나 반갑던지.

 6시간의 긴 작업 끝에 겨우내 깨진 화장실 세면대와 샤워실 수도꼭지를 바꿔주고, 깨진 변기도 교체해주고, 온수기도 용량이 큰 걸로 새로 설치해주셨다. 땅 밑 수도관이 깨지진 않았는지 누수탐지도 해주셨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누군가에 의해 고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시기다. 오늘만큼은 그분이 나의 슈퍼맨이었다.  



3월 5일

 오늘 밤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회사에서 친하게 지낸 선배와 후배 둘이 ‘첫, 다락’에서 하루 자보겠단다. 아무래도 낯선 손님을 받아야 할 공간인데, 아는 사람이 미리 자보면서 불편했던 점이나 보완할 부분을 얘기해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물론 그건 핑계고 그냥 나랑 술 마시러 와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더 고마웠다.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까지 공사로 어수선해진 내부를 정리하고, 마당을 쓸고, 어제 빨아놓은 이불 세트를 말렸다. 앞으로 매주 손님을 받을 때마다 해야 할 일이다. 내 이불은 그렇게 빨기 귀찮았는데 손님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혹시 더러운 곳은 없는지 더 세심하게 손길이 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두 사람이 도착했다. 회사에서 늘 보던 얼굴인데 어찌나 반갑던지. 와인 담은 커피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첫서재의 밤이 여물었다.


3월 6일


 동파된 기기들을 빠짐없이 점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가. 커피메이커가 그 사이 고장이 난 모양이다. 원두를 갈아 추출할 때마다 뜨거운 물이 바닥 아래로 줄줄 새어 나왔다. 서비스 센터에 연락해보니 평일은 되어야 고칠 수 있단다. 배송이 왔다갔다 하는 데에만 꼬박 1주일이 걸린다고도 한다. 가게 오픈까지 보름 남짓. 결국 다음 주에 하루 날을 잡아 서비스 센터가 있는 용인까지 직접 실어 나르기로 했다. 첫서재 문을 열기나 열 수는 있는 걸까.



3월 7일


내일 잠시나마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렇게 할 일이 쌓여 있는데 여행이라니. 짐을 싸면서 내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서재 이용 및 예약 방법 (22.10.10 업데이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