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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Mar 14. 2021

미노광 여행


 아마도 지난 한 달은 어른이 된 이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간으로 기록될 것 같다.


 직장에서는 1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의 연출을 처음 맡았고, 방송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휴직을 한 뒤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왔다. 새로 얻은 집에서는 이삿짐을 정리하고, 한편으로는 가게(첫서재) 오픈도 함께 준비해야 했다. 프로그램 연출, 지방살이, 공유서재 오픈. 이 모든 게 39년 생에서 처음 시도하는 일들이었다. 밀물처럼 ‘난생처음’들이 한꺼번에 덮쳐온 한 달. 거기에 정리되어야 할 마음까지 생겨버렸다.


 첫서재 오픈을 앞두고, 잠시 떠나기로 했다. 어쩌면 올해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가게 문을 열면 아무래도 몸이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까. 지난주부터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된 바람에 아내와 한 주씩 번갈아가며 따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멀지 않고 익숙한 도시들을 택했다. 난생처음들에 지쳐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맞이하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게 정다운 기억을 안겨주었던 도시들을, 시외버스를 타고 하루 한 곳씩 다시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예전과 다른 점을 꼽자면 DSLR 카메라를 들고 가지 않았다. 2년 전 여름 도쿄 출장 때 산 중고 필름카메라 하나만 덜렁 가방에 챙겼다. 1963년산 카메라니까 중고라기엔 실상 골동품에 가깝다.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매번 조리개를 맞추고 초점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 어지간히 불편한 녀석이다. 그래도 그 둔한 감각과 흐릿한 색감이 좋아 보물처럼 아꼈는데, 어쩌면 이 녀석과도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필름은 한 롤만 챙겼다. 사진 두 컷이 한 장에 담기는 형태의 하프카메라이기에, 내겐 정확히 72장의 순간만 담아올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애초에 꺼낼 생각도 없었다.



 첫날. 아침 일찍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강릉에 들렀다. 지난해 여름보다 차가워진 바다와, 조금 더 한산해진 고래책방을 필카에 아껴 담았다. 봄의 바다를 한참 걷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걷다가, 어느새 저 멀리 등대에 다다랐다. 등대에 다다른 순간 너무 멀리 왔다고 느꼈다. 날은 저물어 있었다. 지난 여름밤처럼 텐트를 펴고 오손도손 모여 앉아 음악을 듣기엔 강릉의 밤이 부쩍 시렸다.


 둘째 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남짓 걸려 속초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는 ‘완벽한 날들’이라는 북스테이였다. 4년 전 가을에 후배 두 녀석과 들렀는데, 이번에는 꼭 1인실에 머물고 싶어 다시 찾았다. 1인실에서는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애써 영화 한 편을 담아왔지만 허사였다. 하필 내가 머문 날 빔프로젝터가 제대로 작동되지가 않았다. 내가 기기 조작에 미숙한 탓일 수도 있다. 아쉬움이라도 담고 싶은 마음에 비좁은 방구석에서 필카만 찰칵찰칵 눌러댔다. 실내여서 조리개를 여닫는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셋째 날. 하루에 넉 대 밖에 없는 인천행 고속버스를 서둘러 탔다. 세 시간을 달려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뒤 택시를 바꿔 타고 개항로에 닿았다. 지난해 틈이 날 때마다 1호선 급행을 타고 들렀던 동네. 계절은 달라도 올 때마다 공기의 온도와 질감은 비슷했던 것 같다. 늘 그랬듯 빛을 만드는 카페에 먼저 들러 한참을 머물렀다. 여기서 찍은 옛 사진 들을 들추어보고, 같은 화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거리로 나가 항구 쪽으로 걸었다. 오래된 책냄새가 풀풀 나는 노란 한미서점, 몇 년째 신장개업인지 모를 풀잎다방, 언덕 위 답동 성당의 손등 도장까지 모두 안녕했다. 그 다정한 안녕을 한 장씩 조심스레 주워 담았다. 날이 생각보다 일찍 어두워져 제대로 찍히기나 했을지 걱정이 앞섰다.


 마지막 날은 서울이었다. 서울을 여행으로 온 건 처음이다. 39년간 서울에서만 살아왔으니. 먼저 사흘간의 기록이 담긴 필름을 돌돌 말아 꺼내어 단골 인화가게에 맡겼다. 그리고는 홍대입구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자주 들르던 1984 카페, 그리고 익숙한 연남동 길까지. 20년 가까이 이 주변에서 살았는데 한동안 돌아다녀봐도 아는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오후에는 문래동을 찾았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가 늦은 밤 춘천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흘간의 여행이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나흘뿐이었는데 몸이 앓아왔다. 덜컥 한 시기가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이 캄캄했다.


 춘천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웹하드에 접속했다. 필름인화 가게 아이디로 로그인하면 스캔한 사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가장 떨리는 순간이다. 아이디와 비번을 누르고, 인화한 날짜 폴더를 클릭하고, 내 이름 폴더를 여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사진이 줄줄이 업로드되어 있어야 할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화면 한 구석을 보니 가게 측에서 무심한 메모 한 줄을 남겨두었다.


 ‘미노광 필름.’


 빛에 노출되지 않은 필름, 그러니까 쓰지 않은 필름을 내가 맡겼다는 거다. 필름을 처음 카메라에 감을 때 톱니바퀴에 제대로 끼워 넣지 않았나 보다. 나는 찍히지도 않을 사진을 위해 도시를 옮겨가며, 매번 조리개와 초점을 일일이 조정해가며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던 셈이다. 수동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람들에겐 이런 재앙 같은 순간이 가끔 찾아온다는데, 나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필름카메라만 들고 갔던 여행에서, 하필이면 나와 사진밖에 없던 여행에서 사진이 증발해버리고 덜렁 나만 남았다. 필름이 한 통 밖에 없었기에 한 장 한 장 더 아껴 누르던 모든 순간들이 가슴을 조였다. 몹시 품고 싶은 순간들이었는데. 이젠 기억 속에서만 잔존하게 되었구나. 달리는 열차 복도에 털썩 주저앉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미노광 필름’이란 말뜻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별 것 아니어서 더 귀중했던 지난 나흘의 기억은 그렇게 사진이 아닌 생소한 다섯 글자로 저장되어버렸다. 당분간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단어로 남겠지만, 어쩌면 이번 여행을 빼닮은 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어른이 된 이후 가장 혼란스러웠던 한 달의 끝에서 떠난 여행. 새로 간 곳도, 새로 본 것도 없이 흘러갔던 나흘은 촬영되지 않은 필름 같은 나날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여행 내내 떠올렸던 것들은 결코 빛에 노출될 수 없는 기억들이었으니.

 기차가 목적지인 남춘천역에 다다를 즈음, 나는 허탈하게나마 작은 웃음을 되찾았다. ‘미노광 여행’이 끝났다. 내일은 다시 아침 일찍 아이 손을 잡고 등교시키고, 첫서재로 향해 잔뜩 밀린 오픈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유일하게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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