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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pr 18. 2021

방이동에 두고 온 날들


카톡이 울렸다.
경환이었다.
돌아가셨구나.
틀리길 바라는 직감이었고, 틀리지 않았다.

경환이와 나는 네 살배기 꼬마 시절부터 옆집에 살았다. 윗집에는 동갑내기 산하가 있었다. 유치원부터 학창시절 내내 우리 셋은 등하교를 같이 했다. 같이 성당을 다니고, 같이 피구나 와리가리를 하며 놀고, 같이 불장난도 하며 국민학생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들어서는 함께 학원을 다니고, 수능 전까지 독서실 옆자리에서 나란히 공부했다. 16년을 붙어 있었으면서 그 흔한 다툼 한 번 없던 삼총사였다. 우린 제각기 성 씨가 달랐지만 다른 친구들은 우리 셋을 묶어서 그냥 로 불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남 씨였고 가장 특이한 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스무 살 때 내가 처음으로 이사를 가면서 우리는 해체됐다. 이후에는 각자의 대학에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생각해 보면 우린 성격도, 기질도, 취미도 달랐다. 그저 옆집과 윗집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화학적 거리감을 강제로 끌어당겼던 것 같다. 누가 먼저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도하는 사람도 없다 보니 이사와 함께 우린 자연스레 멀어졌다. 지금은 동네 친구들의 경조사나 송년모임에서 우르르 만날 때만 보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경사와 조사 중에 우리 셋은 이미 경사를 차례로 치렀다. 지금은 송년모임을 할 시기도 아니다. 연락이 오면 불길한 직감이 들 수밖에.

저녁 8시. 가게 문을 닫고 춘천에서 서울로 향했다. 옷을 차려 입고, 차를 몰고, 유난히 깜깜한 서울 가는 고속도로를 운전대 꽉 붙잡고 달렸다. 도착한 아산병원에는 오랜만에 봐도 한눈에 알아볼 법한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사진 속에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옆집 아저씨. 평생 허허허 웃어주던 모습밖에 기억나지 않는 사람.

사진 속 아저씨를 한참 바라보다 이내 무릎을 꿇고, 오랜만이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다. 경환이의 두 누나가 애써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형석이 왔구나.
네, 누나들도 잘 계셨지요?
나 너 뉴스에서 맨날 봤어.
쟤 우리 옆집 살던 꼬마애라고 남편한테도 얼마나 자랑했는데.
먼 길인데 와줘서 고마워.  
에이, 뭘요. 눈은 좀 붙이셨어요?

빈소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학창시절 다니던 독서실 마냥 아크릴 칸막이들이 서로를 가두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 스티커가 칸막이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다행히 독서실과 달리 투명해서 건너편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였다. 와, 오랜만이다. 너도 왔구나. 야, 우리 거의 10년 만인가? 넌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본 거 같은데? 

밥을 먹고 입을 가린 채 수다를 떨다 보니 경환이가 옆에 앉았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어딘가로 수렴해갔다. 우리의 코가 묻어 있는 동네. 방이동. 거기 두고 온 날들을 우리는 기억 속에서 하나씩 꺼내어 담았다. 이제는 다들 그때의 우리만한 자식들이 집에 한둘 씩 있었다. 새삼 그 어릴 적 동네에 대해 그리워할 만한 나이였다. 왜 우리 여덟 살 때는 엄마들이 함께 손잡고 등교를 시켜주지 않았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두침침한 골목길과 큰 찻길을 지나야 했던 등굣길이었는데, 이런 류의 말들이 오갔다. 그중 가장 신기했던 건, 그때는 미처 몰랐던 동네 어른들의 배려였다.

생각해봐. 우리 옛날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야구할 땐 말야. 1루, 2루 베이스가 없어서 주차된 차들을 베이스 삼아서 짚고 뛰고 그랬잖아. 배트로 친 테니스공이 차를 때려도 누가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팽이 할 때 기억 안 나? 보도블록이 깨질 듯이 쇠팽이를 던져도 경비아저씨가 한두 마디 하고 그냥 휙 돌아가셨지.

코오롱 아파트 생기고 지하주차장이란 걸 생전 처음 봤을 때 있잖아. 신기해서 우리 맨날 거기를 뛰어다니고 비비탄 총싸움하고 그랬는데 차들이 다 알아서 우릴 피해 다녀줬어.

너네 집에서 맨날 엄청 뛰어다녔는데 왜 그땐 층간소음 갈등 같은 것도 없었을까? 아, 밑에 집이 걔네 집이어서 그랬나?

그때 어른들은 왜 그걸 다 그냥 넘어가줬지? 지금 어른이 된 우리는 왜 다 넘어가지 못하지?
.
.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친구들을 경환이가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춥다, 어서 들어가. 그래. 와줘서 고마워. 이런저런 말이 공중에 오가는 사이 잠시 경환이의 손을 잡았다. 경환이 아버지, 아니 옆집 아저씨는 오랫동안 파킨슨 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랫동안. 참 간결한 말이다. 그 오랫동안 경환이의 하루하루는 어땠을까. 말로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포갠 손길 사이로 전하고 왔다. 사실 다 전하기엔 다른 친구들도 있었고, 찰나의 시간이었다. 경환이의 손을 붙잡았던, 지금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 손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손 말고 입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못했을까. 남자들은 이렇게 길러진 건지도 몰라. 이것도 우리 세대에만 유효한 얘기인가. 얼른 운전에 집중해야 했다. 춘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유난히 깜깜하니까.

집에 도착하니 새벽 두 시였다. 내일 아침엔 평소보다 더  일찍 가게로 출근해야 한다. 북스테이 다락방 청소까지 해야 하는 날이니까. 다만 알면서도 잠이 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날 새벽, 나는 방이동에 두고 온 날들 속을 한참 유영해야 했다. 아파트촌과 재래시장이 섞여 있던 동네. 그래서 반지하방 친구도 45평 고층아파트 친구도 다 그냥 친구였던 동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이 놀기엔 좀 위험했지만 어른들은 방관인지 배려인지 그냥 놔두기만 했던 동네. 외고에 지원해보라는 부모님 말에 울고 불며 이 동네 애들과 떨어지기 싫다고 애원하던, 그 동네.
   
헤어지기 직전, 경환이가 ‘요새 방이동엔 가봤어?’라고 묻지만 않았어도 유영의 시간은 꽤나 줄었을 것이다. 윗집 살던 산하는 대전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내일이나 돼야 빈소에 올 거라고 했다. 산하를 보고 싶어서 빈소에 한 번 더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 이내 불경한 마음을 거두었다. 내일이 아니라도 셋이 다시 만나는 날이 올까. 그게 방이동이라면 좋겠는데. 아마 당분간은 힘들 거야. 각자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우리 셋은 누구 하나 만남을 주도하는 성격도 아니니까. 결국 또 불길한 카톡이 울려야만 조우할 수 있는 사이인 걸까.

...라고 생각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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