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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ug 08. 2021

내가 자라는 화분의 크기는 얼마큼일까

<성장의 조건>


 담쟁이넝쿨을 키우기로 했다.

 지난겨울, 첫서재 앞마당 담장 공사를 마치고 나서 든 생각이다. 시멘트로 밑동을 단단히 받치고 목재를 뉘어 울타리 삼아 봤지만 아무래도 좀 휑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처음 보는 게 담장일 텐데, 우거진 녹음을 선사하진 못해도 초록이 반기는 기분이라도 내키게 하고 싶었다. 벽화를 그려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결론은 담쟁이였다. 벽을 타고 올라 울타리에 휘감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테지만 뭐, 개의치 않았다. 첫서재에게도 같이 자라는 동갑내기 생명친구가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테니까. 어쨌든 날이 풀리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새 봄. 담쟁이 모종을 심기 전에 어떤 종을 키워야 할지부터 알아봤다. 산지와 생육기간 별로 종류가 제법 다양하더라. 우선 가장 크고 튼튼해 보이는 미국산과 우리 땅에서 잘 자랄 것 같은 국산 몇 종을 골랐다. 생육기간도 갓 발아된 가냘픈 모종부터 나뭇가지의 모양새를 제법 갖춘 묘목까지 종류별로 주워 담았다. 다음은 어디에 심어야 할지 정할 차례였다. 땅을 깊게 파서 화단을 조성해놓은 오른쪽 담장은 화단과 담장 틈새에 심어두면 되었다. 문제는 왼쪽 담장이었다. 이미 라일락나무를 둘러싸고 벤치 틀을 짜 놓은 터라, 새로 화단을 일굴 공간이 남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심한 끝에 화분 몇 개에 모종을 나눠 심은 뒤 담 아래 바짝 붙여두기로 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화분부터 팔뚝 만한 화분까지 크기 별로 나란히 놓아두고, 산지와 생육 상태가 제각기 다른 아기 담쟁이들을 섞어서 심었다. 서로 말은 안 통하겠지만 사이좋게 지내라, 덩치 크다고 작은 애들 괴롭히지 말고, 당부하면서.

 (요즘 유행이라는) 여름이었다. 과연 이게 담에 들러붙으려나 의심스럽던 연약한 담쟁이들은 용케도 저마다 생존본능을 발휘해 잘 자라주었다. 서향집의 햇볕과 주인장의 애정을 듬뿍 먹은 덕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담쟁이가 제일 튼실히 자랐을까? 미국 담쟁이일까, 국산 담쟁이일까. 가냘픈 모종이던 녀석일까, 제법 튼튼한 묘목이던 녀석일까. 볕은 공평하게 받았고, 다른 조건들도 비슷했기에 나조차 몹시 궁금해하며 키우던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산이든 아니든, 모종이었든 묘목이었든 크게 상관없었다. 담쟁이들은 예외 없이 자기 화분의 크기만큼 자랐다. 가장 작은 화분에 심은 녀석들은 생산지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두 뼘 남짓조차 자라지 못했고, 조금 더 큰 화분에 심은 녀석은 무릎 높이만큼은 자라났다. 그리고 땅을 깊게 파서 일군 화단의 담쟁이들은 종류에 관계없이 울타리를 몇 바퀴 휘휘 감을 정도로 컸다. 대지의 양분과 기운을 흠뻑 빨아들여서일까. 어쨌든 담쟁이들은 자신을 감싸안은 세계의 크기, 꼭 그만큼씩 자랐다.


오차 없이 화분 크기에 비례..


 저마다의 그릇대로 커 가는 담쟁이들을 보면서, 문득 내가 자라고 있는 화분의 크기가 궁금해졌다. 나는 얼마큼 큰 세상의 품에서 자라나고 있을까? 일단 공간의 부피로는, 근래 들어 아주 작은 화분에 옮겨 심어진 듯하다. 휴직 전에는 매일 같이 서울의 으리으리한 건물로 출퇴근하다가 지금은 소도시의 열댓 평 남짓 아담한 가게에만 머물고, 좁은 공간에서도 가장 비좁은 카운터와 주방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탓이다. 자연스레 돈을 주고받는 단위도 확 줄었다. 회사에서 몇 백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몇 천만 원의 예산도 거뜬히 움직이던 나였는데, 지금은 두 시간 머무는 손님에게 꼬박꼬박 오천 원씩 받으며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보니 단돈 몇 천 원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도 잦아졌다. '저 손님은 두 시간보다 20분 더 머물렀는데 4천 원을 더 받아야 하나?', '왜 하루 정산을 해보니 천오백 원이 비지?' 이를테면 이런 고민으로 시간을 한참 허비하는 경우가 늘었다. 비단 돈의 크기뿐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작은 공간을 다듬는 일만 해도 하루가 바삐 흐르다 보니 공간 바깥에 관한 관심이 현격히 줄었다. 직업이 방송기자이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잘 모르고 산다. 모든 게 느린 마을에 사는 만큼 주변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살 일도 줄어, 굳이 성장할 필요성마저 체감하지 못한 채 시간을 넋 놓고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을까. 자식을 더 큰 도시나 해외로 보내려는 어른들에 대해, 이제까지는 한 줌 삐딱한 마음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자기 자신도 못 가본 세상을 어떻게 더 낫다고 예단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의 발로 쯤일 거라 여겨왔다. 하지만 담쟁이의 성장을 바라보다 보니, 그런 내 삐딱함이 도리어 미천한 경험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부모든 제 자식이 자라는 화분의 크기를 힘닿는 대로 넓혀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들도 내가 담쟁이를 바라보며 이제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을, 저마다의 삶의 반경 어디에선가 목도했을지 모르니.

 물론 더 발전된 도시와 나라라고 해서 무조건 ‘큰 화분’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대도시 마천루에 출퇴근하며 살아도 성장을 멈춘 사람도 있고, 반대로 비좁은 골방에서도 기막힌 통찰을 해내는 이도 있으니까. 공간의 물리적 크기로만 나의 세상을 가늠한다면 그것 또한 착각일 수 있다. 그런 표면의 잣대보다는, 결국 '다양성'의 관점에서 내가 자라는 화분의 크기를 재볼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다양한 사람과 사유를 접하며 살고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손과 발에 묻히고 있는지에 걸맞게 나는 확장될 테니 말이다. 물론 햇볕과 애정을 부족함 없이 먹고 있다면.




 소도시의 작은 가게 카운터에 갇힌 듯 앉아 몇 천 원에 쩔쩔매며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이런 나의 현재를 '작은 화분'으로 치부하는 순간 나는 두 뼘 남짓밖에 자라지 못한 가장 작은 담쟁이처럼 성장을 멈출 것만 같다. 다행히 우리 가게는 공유서재이기에,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길쭉하게 늘려줄 책들이 지척에 널려 있다. 돈이 오가지 않는 다락방 북스테이에도 다양한 세대와 사연의 손님들이 드나들기에 교류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게다가 연고도 없이 찾아온 춘천이라는 도시 역시 아직까지는 새로이 익힐 것들로 넘쳐난다. 손바닥만한 화분처럼 보이는 공간일지라도 밑동은 깊은 대지와 끝 모르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 비옥함을 기꺼이 활용하는 건 나의 몫이기에, 비좁은 공간에 머물러도 드넓은 흙밭을 헤엄치듯 사유하며 살아야겠다고 거듭 다짐해본다. 춘천에서 스무 달을 보낸 뒤 내가 얼마큼 자랐는지는 아마 누구든 쉽게 알아챌 수 있을 터이다. 저마다의 성장 속도가 눈에 훤히 띄는, 저 앞마당 푸릇한 담쟁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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