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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ug 22. 2021

유리창을 닦는 시간

<닦으면 투명해지는 것들을 닦는 기쁨>


 아마 하루 일과 중 가장 지루한 작업을 꼽으라면 유리창 닦기일 것이다.


 아침 청소시간마다 적어도 십 분 가량은 유리창을 닦아내는 데 쏟는다. 가게를 통창으로 리모델링 한 데다 독립서재까지 유리로 둘러싸여 있으니 일단 닦아낼 면적부터 넓다. 게다가 바닥 걸레질 같은 다른 청소는 팔을 아래로 내린 채 움직이는 데 비해 유리창 닦기는 중력을 거슬러야 하므로 힘에 더 부치는 편이다. 섬세한 반복 동작이 많아 손목에도 자주 무리가 간다. 또 물 대신 자동차 워셔액을 헝겊에 묻혀 닦아내다 보니 아침부터 화학약품 냄새가 코끝에 물든다. 이렇게 불편한 점이 많은 주제에 유독 비효율이기까지 하다. 아무리 정성껏 닦아내도 손님이 손잡이가 아닌 유리 표면을 밀며 가게에 들어오면 애써 닦아낸 노력이 헛일이 되는 탓이다. 비가 조금만 내리거나 먼지가 심한 날에도 마찬가지다. 한참을 닦은 유리가 단 몇 분 사이에 금세 더러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저 허탈하기만 하다.


 유리창을 닦아내며 짜증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단연코 파리똥을 벗겨낼 때다. 언제 머물다 떠났는지 하루만 지나도 하얀 소금가루 같은 것들이 투명한 유리 표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루 안에 발견해내면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 놔두었다가 닦으려 하면 그 사이 바싹 말라붙어 헝겊 따위로는 좀처럼 닦이지가 않는다. 결국 일일이 손톱으로 긁어낸 뒤, 다시 손톱자국을 헝겊으로 닦아내고 손까지 씻는 삼중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그런 파리똥이 유리창마다 수십 군데씩 붙어 있으니 볼 때마다 여간 신경을 긁는 게 아니다. 팔이 잘 닿지 않은 높은 곳에 그게 붙어 있을 때는, 온화한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욕을 내뱉는 순간이 되곤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런 유리창을 닦아내며 나는 늘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가장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면서 동시에 가장 맑은 기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정교하게 짚어내긴 어렵지만 아마도 유리만의 투명한 물성이 마음속에서 비슷한 투명도의 감성을 이끌어내는 게 아닐지 추측해본다. 더러운 벽은 닦아도 벽이고, 지저분한 바닥은 닦아도 바닥이다. 하지만 유리는 더러운 것을 벗겨내고 나면 바깥 공간과 실내를 눈에 띄게 투명하게 이어준다. 벽인데 막혀 있지 않다고 느끼게 해주는 벽이랄까. 그래서인지 유리를 닦아낼 때마다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상쾌한 착각이 들곤 한다. 때를 벗기면 서로에게 투명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눈앞에서 증명해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청소와는 다른 차원의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또한 유리창 닦기는 비효율이라 내키지 않지만, 한편으로 비효율을 온전하게 체감하는 시간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효율적인 무기로 길러지던 학창 시절과 회사생활의 가장 반대편에 닿아 있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쉽게 더러워지면 어렵게 닦아내는 더딘 과정을 매일 반복하며, 나는 효율 따위 잊고 사는 나 자신에게 뜻 모를 격려의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 든다. 거기에 누군가 깨끗이 닦인 유리를 말없이 바라봐줄 때 얻는 무언의 행복은 덤이다. 귀찮은 작업인 줄 알면서 시간을 쏟아붓는 정성을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것. 그 마음은 대개 말로 표현되지 않기에 늘 분명치 않지만, 그 모호한 시선을 감지하는 순간만큼은 고된 노동의 보람이 아침 공기처럼 폐에 스민다.


 마지막으로, 유리는 그래도 닦인다. 그동안 닦이지 않는 것들을 닦아내려 애쓰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특히 지나온 시간에 버려두지 못한 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죄의식, 수치심, 질투 같은 감정들이 그렇다. 그런 마음의 때 같은 감정들을 유리창을 닦아내며 종종 보듬거나 어르고는 한다. 좀처럼 닦이지 않아 더러워진 채 방치된 마음도 언젠가는 이 유리창처럼 닦이기를, 하고 마음으로 읊조리며 헝겊질을 해대는 식이다.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투명한 본질로 돌아가는 유리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괴롭지만 맑은 착각의 시간이다.




 시간이 꽤 흘러서일까. 요즘 들어서는 첫서재 문을 막 열었을 적에 비해 유리창 닦는 일에 꽤나 소홀해졌다. 매일 아침마다 닦는 시간도 줄어들고 있고, 비 예보가 있거나 손님들이 자주 드나드는 시간이면 어차피 더러워질 거 그냥 놔두자는 생각이 더 앞서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카운터에 앉아, 때 묻은 유리창을 닦을 생각은 않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시간도 늘었다. 타고난 게으름이 스멀스멀 발동한 탓이겠지만, 그 역시 그런대로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원래 투명해야 할 것이 투명하지 못한 꼴이 마치 내 맘 같기도 하고, 여기서 더 눈에 띄게 더러워지고 나면 그제야 뒤늦게 닦는 꼴도 꼭 사고를 치고 나서야 마음을 다듬고 반성하는 삶의 과정과 닮아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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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세 더러워진 유리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문득 닦기 귀찮아져서 쓴 글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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