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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ug 29. 2021

공짜 커피 마시러 온 모녀


손님 K를 처음 본 건 늦은 여름 무렵이었다.


 혼자 오셨고,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젊은 손님은 흔치 않기에 도리어 각인이 되곤 한다. 아마 동네 주민이거나 인근 대학교 학생일 거야, 라고 얼핏 추측하며 주문받은 차를 내어드렸다. 한 시간 가량 머물렀을까. 손님은 문득 카운터 앞으로 오더니 머뭇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이 편지지, 지금 가져가서 써도 되는 거예요?”


 가게 메뉴판에 쓰인 ‘첫 편지 프로젝트’ 글을 읽은 모양이다.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어두고 가면 공간값을 받지 않습니다.’ 쓰인 그대로라고 설명드리면서 두 가지 조건을 주지했다.


“편지를 전할 수 없는 수신인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요. 남기고 간 편지의 저작권을 저희에게 양도해주셔야 합니다. 두 조건에 동의하시면 공간값 대신 편지를 받으니 마음껏 가져가 쓰셔요.”


 메뉴판 앞에 놓인 편지지에 대해 손님들이 물을 때마다 나는 키오스크처럼 같은 주의사항을 반복한다. 손님 K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가져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짐을 싸들고 카운터 앞으로 온 그는 신용카드 대신 편지지가 담긴 봉투를 쭈뼛 내밀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대문 앞에 새 둥지 모양의 나무 우체통이 있어요. 거기 편지를 넣어두고 가시면 저희가 퇴근할 때 걷어 갈게요.”


 손님은 떠났다. 공간값 대신 편지지 받는 프로젝트를 몇 달째 진행하다 보니, 손님 뒷모습을 바라보며 편지 내용을 짐작해보는 고약한 버릇이 생겼다. 어떤 손님은 편지봉투가 얇아 보여도 뒤돌아서는 기운이 묵직하게 감각된다. 어떤 손님은 돌아서는 등허리에 슬픔이 업혀 있다. 섣부른 나의 예측이 틀리길 바라지만, 그런 분의 편지를 뒤늦게 꺼내어 읽을 때면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착 내려앉을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어떤 손님은 편지지를 가져가는 손바닥부터 부산스럽다. ‘이거 한 장 쓰면 커피 공짜로 마실 수 있다는 거지?’라는 심산일 텐데, 표정을 애써 숨겨도 기운까지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 분들의 편지를 뒤늦게 확인할 때면 허탈한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 우정, 우리 사랑 영원히’ 류의 편지가 그렇다. 직접 상대에게 주시면 될 텐데, 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또 커다란 감정의 굴곡이나 일상의 변곡 없이 그저 일기 쓰듯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도 그렇다. 그런 글들은 하나같이 몇 줄 겨우 끄적인 채로 고이 접힌다.


 나는 편지지를 건네는 손님 K의 눈빛과 주춤거리는 손등과 돌아서는 등허리를 느슨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편지는 그다지 무겁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다. 퇴근길, 새 둥지 모양의 나무 우체통에서 오늘의 유일한 편지봉투를 꺼내 들었다. 길을 걸으며 무언가 읽기 좋은, 밝은 여름의 저녁이었다. 편지지 맨 앞줄에는 ‘4년 후의 나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평범한 일기는 아니었구나. 미래의 자신에게는 편지를 부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편지 길이도 한 장이 넘었으니 예상보다는 훨씬 길었다. 돌아서는 손님을 두고 섣불리 예단을 한 게 못내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마음이 찡하거나 코끝이 시리거나 은근히 미소 짓게 되는 편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의 글 같았다. 서툰 활자를 읽어내리며 걷는 시냇가로 도시의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 후로 보름 가량이 지났다. 손님 K는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못 되지만, 불과 얼마 전에 편지를 남기고 떠난 분까지 잊히지는 않았다. 한 줌 미안한 마음을 묵혀두고 있었기에 다시 찾아주신 게 마냥 고맙기만 했다. 다만 조심스러운 마음에 알은체까지 하지는 않았다. 손님 K는 그림책방 2인석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 후에 일행이 도착했는데 한참 나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엄마 여기야, 라는 손님 목소리에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음료를 주문하자마자 메뉴판 앞의 편지지를 묻지도 않고 불쑥 가져갔다. ‘혹시 저번에 쓰지 않으셨나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꾹 집어삼켰다. 옆에 계신 엄마가 불쑥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모셔왔을 수도 있을 테니까. 다만 저번처럼 자기 자신에게 또 보내면 안 된다는 당부는 드리고 싶었다. 보름 전의 편지를 기억 못 하는 척하며 다시 키오스크처럼 조건들을 주지해드렸다.


“편지를 전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쓰실 수 있습니다. 동의하시면 편지지를 가져가세요.”


 강조하고 싶은 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손님 K는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편지지를 두 장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고작 20여 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은 다 마신 음료와 함께 편지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익숙한 몸짓으로 내게 빈 잔을 내어주고는 짧은 인사를 우물거리며 떠났다. 두 사람의 돌아선 등허리를 오래 응시할 필요는 없었다. 머문 시간, 그러니까 편지를 쓰는 데 걸린 시간만 봐도 편지의 무게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퇴근길에도 편지를 읽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해요. calm, relax, beach…’ 띄엄띄엄 쓴 글씨로 열 줄 남짓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해놓은 편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어머니 편지지도 열어보았다. ‘나는 새벽 다섯 시에 기도를 하고 산책을 한다…’로 시작하는 단출한 몇 문장의 일기가 적혀 있었다. 거듭 설명을 드렸는데 내 말은 듣지 않으셨을까. 듣고도 무시한 걸까. 괜히 욱한 마음도 들었다. 이러라고 공간값 대신 내어드린 편지지는 아니었으니.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고, 처음 이런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어느 정도 각오한 상황이기도 했다. 어떻게 매번 다 내 맘 같겠냐며 달아오른 마음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래도 진심을 다해 써주시는 다른 분들이 더 많으니 크게 보면 여전히 잘한 일 같았다. 두 사람의 편지도 혹시 먼 훗 날 소중해질지 몰라, 라고 중얼거리며 집에 돌아와 고이 보관통에 놓아두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아내가 가게를 보는 날이었는데, 다소 언짢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어떤 모녀 두 분이 오자마자 음료를 주문하고 바로 편지지를 집어들기에 <첫, 편지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드리려 했더니, ‘다 알아요’라며 그냥 자리로 가시더란다. 그리고 불과 20분 남짓 지나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돈을 내지 않고 바로 가게 문을 열고 나가셨다고 했다. 책 한 권 들여다보지 않고, 음료를 천천히 들이키고 편지를 얼른 쓴 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나가는 모습에 회의감이 들더란다. 문득 두 번이나 뵈었던 손님 K가 떠올랐다. 함께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을 보니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우리는 편지봉투 안에 ‘온라인에 게재하거나 출판물 형태로 나올 때 저작권을 양도하겠다’는 동의서를 넣어둔다. 거기 이름과 이메일 혹은 연락처를 적어두도록 하는데, 세 번째 같은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내용 역시 특별할 것이 없는 일기였고, 작은 편지지의 반 장도 채 채워지지 않았다. 심지어 손님 K의 어머니는 나흘 전 남기고 간 편지와 거의 흡사한 내용을 적어두셨더라.


 속이 상했다. 두 분의 공간값이야 몇 푼 치지 않더라도, 호의가 이용당했다는 기분이 평정심을 간지럽혔다. 나름대로 대책을 세울 필요도 있어 보였다. 사실 손님 K 말고도 서너 통의 편지 중 한 통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지난달에는 네 분의 손님이 함께 와서 음료 넉 잔을 주문하고 네 통의 편지를 쓰고 갔는데, 그 글자 수를 다 합쳐봐야 백 글자가 채 안 되는 일도 있었다. 첫서재 SNS 계정에 이런 일들을 언급하며 <첫, 편지 프로젝트>의 취지를 다시 설명하는 공지를 올릴까? 아니면 메뉴판에 더 엄격한 문구를 적어 놓을까? 여러 생각이 들다가 문득 손님 K에게 먼저 서운함을 전하고 싶어졌다. 혹시 우리의 생각과 달랐을 수도, 아니면 우리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편지봉투 속 동의서에 나온 연락처에 긴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K님, 안녕하세요? 첫서재입니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보았습니다. K님의 편지는 세 통째네요. 다만 저희가 '보낼 수 없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보내야 한다고 매번 주지를 드렸는데도, 늘 자신에게, 혹은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일기를 짧게 남기고 가셨지요.

 K님.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공짜 커피 이벤트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엔 사무치게 그립지만 도저히 편지를 보낼 수 없는 누군가를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닿을 수 없는 편지를 마음속에 무겁게 품고 사는 이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편지를 남기고 가시는 분들은 멀리서 이거 하나 보내기 위해 애써 와 주시거나, 몇 시간씩 머물면서 고심해서 쓰고 가십니다.

 K님이 두 번째 편지를 남기고, 어머니가 첫 번째 편지를 남기고 가신 일주일 전을 기억합니다. 그때도 저희 취지를 고려하지 않은 편지를 또 남기고 가셨지만, 어머님까지 모시고 오신 마당에 저희가 받아들이는 게 도리일 것 같아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 분이 또 오셔서 이런 짧은 일기를 툭 남기고 음료 두 잔을 얼른 드시고 가시는 건, 애써 누군가를 위해 편지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저희의 의지를 한참 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희가 K님의 입장을 다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터입니다. 아무쪼록 언짢은 마음 없으시길 바라며, 저희의 취지를 알려드리기 위해 이 메시지를 드렸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K님에게 직접 의사소통하는 방식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축축한 날씨지만 좋은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 첫서재 드림.”


 최대한 진의를 담기 위해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손님 K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이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면 내가 할 일은 끝난다. 전송 버튼만 누르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욱 하는 마음에서 발원한 행동은 늘 후회가 찌꺼기처럼 남았는데 이번에도 혹시 그렇진 않을지 덜컥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을 거듭 되짚어 봐도 맘에 걸리는 문장은 제거할 만큼 한 듯했다.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 건지 스스로에게 몇 번은 되물어봤지만 아무래도 수용될 만한 의사표시 같았다. 그런데도 끝까지 버튼이 잘 눌러지지 않았다. 확, 하는 마음도 일었지만, 결국 나의 이유 없는 주춤거림에도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문자 전송을 잠시 미루기로 했다. 하루가 지나도 같은 기분이면 그때는 반드시 보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문득 또 다른 경우의 수가 떠오른 건 늦은 밤이 지나서였다. 혹시 그들은 커피값 몇 천 원조차 아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던 건 아닐까? 그런 환경이더라도 고아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딸인 손님 K가 우리 가게의 <첫, 편지> 안내문구를 발견하고, 다음번엔 집에 있는 엄마를 꼭 모시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떤 딸이든 그럴 때면 엄마를 떠올리기 마련이니. 늘 단출했던 두 사람의 차림새가 그런 추측을 부추겼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 상상력 바깥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그냥 원래 생각대로 공짜 커피를 마실 의도였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어떤 가능성이든 단정할 수는 없다. 불현듯 몇 달 전, 하루 꼬박 손에서 놓지 못했던 책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누구나 공짜로 재워주는 프랑스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관해 다룬 책인데, 서점 문틀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이방인을 친절로 대하라. 변장한 천사들일지 모르니.’




 아내와 나는 논의 끝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대신 메뉴판에 있는 <첫, 편지 프로젝트> 소개 문구에 ‘편지는 한 분 당 한 통씩만 받을게요’라고 덧붙여 썼다. 속상한 마음도 달래면서, 나의 예단으로 누구도 상처 주지 않기 위한 접점이라고 여겼다. 긴 하루를 결론짓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열렸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었다. 일기장 같은 까만 천장을 응시하다, 문득 손님 K가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또 편지지부터 집어간다면 새로운 공지사항을 말씀드려야지. 아니야, 그것조차 어색할까. 한 번 언제까지 공간값 대신 편지를 남길지 계속 지켜볼까. 이런저런 상황극을 마음속에서 벌여봤지만 다 찝찝했다. 아무래도 다시 오시는 날엔, 그냥 편지 대신 두 시간 푹 책만 읽다 가신다면 서로에게 최선일 것이었다. 그렇게 머물다 돌아선 등허리를 보고 나야 나의 오해도, 불확실성에 기댄 미움도, 이런저런 상상 속의 장면들도 물에 씻기듯 흘러가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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