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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Nov 28. 2021

지도를 북북 찢었다.

<종이를 열자 종이에 갇혔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소도시 여행은 늘 중앙역 인근 여행자센터에서 시작됐다. 유럽의 어느 도시든 기차를 타고 내리면 주변에 ‘tourist information center’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거기서 겹겹이 접힌 종이 지도를 한 장 받아야만 제대로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도가 없으면 관광명소가 어딘지,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조차 가늠할 도리가 없었다. 십몇 의 겨울. 유럽여행 14일 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중앙역에 내린 나는 공식대로 여행자센터를 찾아 지도를 받은 뒤 당일 여행의 발걸음을 뗐다. 오늘의 목표는 호엔 잘츠부르크성까지 걸어 다녀오기였다. 잘자흐 강변을 따라 쭉 걷기만 하면 30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도중에 걸음을 멈출 데가 많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인 미라벨 정원도 가보고 싶었고, 모차르트의 도시인만큼 그의 흔적이 묻은 명소들도 차례로 방문해보고 싶었다. 정오가 갓 지나 기차역에 내렸으니 충분히 즐기다 오면 오후 대여섯 시쯤엔 원점으로 돌아오겠더라. 숙소가 있는 뮌헨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넉넉하게 저녁 7시로 끊어두었다.


 그렇게 첫걸음을 떼자마자 지도부터 폈다. 고백건대 나는 타고난 방향치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고 나면 동서남북을 혼돈한다. 해의 위치와 종이지도를 총동원해야만 길을 제대로 찾아다닐 수 있다. 심지어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과 내가 걷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으면 금세 방향을 잃는다. 그렇다 보니 낯선 길을 걸을 때마다 네모난 지도의 방향을 수시로 좌우로 돌리고 180도 회전까지 해가며 다녀야 했다. 그렇게 미라벨정원과 잘자흐 강변을 무사히 찾아냈고, 모차르트 생가를 거쳐 도시에서 가장 높은 호엔 잘츠부르크성에 다다랐다. 성에서 내가 걸어온 오후의 도시 풍광을 한껏 내려다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불현듯 생경한 기운이 시야를 덮쳤다. 분명히 걸어온 길인데 처음 보는 풍경인 것만 같더라. 처음엔 그저 지나가며 본 장면과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장면의 불일치쯤으로 여겼다. 시선과 시야가 달라지면 같은 길도 다르게 보일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아니었다. 내가 걸어온 길 주변에 저런 모양의 나무와 저런 색감의 건물 외벽이 있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잠시 생각한 끝에 나는 까닭을 찾아냈다. 범인(?)은 지도였다. 걸어오는 내내 지도에 얼굴을 파묻고 다니느라 주변에 있던 신기한 생김새의 나무와 파스텔톤 건물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거다. 아마 이 높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한 풍경과 순간들은 더 많이 놓쳤을 테지. 지도 덕분에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길만 잃지 않았을 뿐 더 많은 걸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온 13일간의 여행길을 되짚어봐도 늘 비슷한 패턴이었다. 나는 초행길의 두려움과 방향치라는 걱정을, 매번 지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방식으로 극복해냈다. 그날 목표한 대로 다 돌아다니려면 길을 잃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내가 걸어다닌 길이지만 어찌 보면 내가 아닌 지도가 여행을 한 셈이다. 마치 지도가 정답이 없는 세상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속여 나를 가두어버린 것도 같았다. 자기주도성이 유난히 강했던 나는 그깟 종이 쪼가리에 조종당한 기분에 한껏 약이 올랐다.


 나는 왜 그토록 길 잃기를 두려워했을까? 목표한 여행을 예정대로 완수하기 위해서였을 테다. 그런데 목표와 여행이라는 말이 애초에 어울리는 조합이었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일상에서 잠시 이탈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왔는데, 여기서조차 또 다른 목표에 돌진하는 꼴이라니. 아마 나는 목표가 없는 하루를 불안해서 못 견디는 인간으로 길러진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이 불현듯 일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호엔 잘츠부르크 성곽에서 나는 종이지도를 북북 찢었다. 아직 오후 네 시. 중앙역에서 뮌헨행 기차를 타기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았다. 이미 한 번 와본 길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여차 길을 잃으면 온대로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될 테니. 그렇게 두 손과 눈이 자유로운 여정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려가는 길,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길이 앞에 나타났는데 한없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뿐인데. 타고난 방향치라 방향이 바뀌는 순간 기억 회로가 리셋되고 만 것이다. 만약 오는 내내 지도만 쳐다보지 않았다면 주변 사물을 눈으로 익혀두기라도 했을 텐데. 그렇게 몇 번의 갈래 길 앞에 놓이고 나니 어느새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골목 어귀를 방황하고 있었다. 잘자흐 강변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지 않겠냐며 호기롭게 생각했는데, 도시를 관통하는 그 기다란 강줄기가 도대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겨울이라 오후 다섯 시가 넘으니 금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혼자 찾아가는 여정을 단념하고 사람들에게 중앙역이 어딘지 물어대야 했다. 그러나 한겨울의 소도시에서는 사람 찾는 일마저 쉽지 않더라. 잘츠부르크의 치안 상황에 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고 왔기에 문득 두려움이 덮쳤다. 해가 지니 어디가 동쪽이고 서쪽인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나침반이라도 있었으면 싶다가, 비싼 돈 들여서라도 택시를 타볼까 싶다가,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겨우 뮌헨행 기차가 떠나기 직전 중앙역에 도착했다. 찬 겨울에도 등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벌써 13년이나 낡은 여행의 기억이다. 모차르트가 초콜릿에 아이스크림까지 파는 도시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낀 바도 없지마는, 그저 쭉 걸어갔다가 돌아온 그날의 여정은 지금껏 일상에서 두 갈래 길 앞에 놓이는 순간마다 내 판단 회로에 기꺼이 소환되곤 한다. 별 볼 일 없이 길만 잃고 헤매던 그날이 어쩌면 삶의 유의미한 변곡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여행지에서 하루에 반나절쯤은 목적지를 두지 않고 떠도는 제법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었다. 일상에서는 웬만한 길이면 내비게이션을 틀지 않는 운전자가 됐다. 비록 가끔씩 길을 잃고 허둥지둥 댈지라도 그 편이 더 나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직업인으로서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업무 외에는 계획의 바깥을 최대한 탐험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도를 꼭 봐야 하는 순간도 수시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설계된 세상 바깥에도 길이 있다’는 감각만큼은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 나는 지도의 한참 바깥 어딘가에서 9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회사를 휴직한 뒤 춘천에 내려와 작은 공유서재를 차렸고, 그사이 세 차례 계절이 바뀌었다. 완전한 행복에 가까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아주 가끔은 마치 잘츠부르크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어느 골목 어귀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내가 나만의 삶의 모양대로 마음껏 일상을 누비는 사이에도 회사는 잘 굴러갈 것이다. 경쟁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는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걷거나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녁 일곱 시로 끊어둔 뮌헨행 기차처럼 다음 종착지에 닿기 위한 시간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13년 전 그 골목에서 덮쳐온 불안이 나를 다시 집어삼키지는 않는다. 나에겐 지도 바깥의 골목을 한참 누비다가도 가까스로 제때 도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때 뮌헨행 기차를 아예 놓쳐버렸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잘츠부르크의 밤거리를 떠돌다 어느 게스트하우스든 들어가 하루 묵게 해달라고 사정하고, 씻지도 못한 채 불안에 떨며 선잠이 들었다면 말이다. 제때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고 여정은 꼬일 대로 꼬였겠지만, 이후의 삶은 더 요란해지거나 확장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제 시간에 겨우 도착한 탓에 나의 세상은 마법이 벌어지지 않고 다시 좁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미라벨 정원과 저 멀리 보이는 호엔 잘츠부르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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