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일곱 시. 서재 문을 닫을 무렵이었다. 북스테이 ‘첫다락’에 머무는 손님과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퇴근하지 않고 주방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커피메이커의 원두찌꺼기를 닦아내고, 물통을 비우고, 그릇 받침대의 컵들을 가지런히 정렬해두었다. 하루를 가라앉히는 시간인데 오른쪽 구석에서 자꾸만 성가신 소리가 들려왔다. 또도독. 또도독. 주방 맨 끝 온수기에서 이른 오후부터 나는 소리였다. 또독, 또독 하고 주기가 점점 짧아지더니 이제는 아예 쉴 틈 없이 소리가 이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내일 수리 기사님을 불러야 하나, 생각하며 화장실을 정리하러 잠시 주방을 비웠다.
불과 몇 분이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주방 개수대는 그사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온수기 밑바닥에서 갑자기 물이 콸콸 쏟아지면서 옆에 있던 커피머신과 소형 제빙기까지 덮친 것이다. 얼른 수도관과 온수기를 연결하는 밸브를 잠그고, 물이 아랫목 집기들을 덮치지 않도록 헝겊으로 훔쳤다. 십수 차례 쥐어짜내고 또 훔치고 반복을 하니 그제야 물기가 걷혔다. 이미 늦은 저녁이라 수리 기사님을 부를 수도 없었다. 당장 온수기가 고장났으니 내일 영업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집에서 쓰던 커피포트라도 가져와야 할 판이었다.
다음날, 커피포트와 생수 6통 묶음을 끙끙 짊어지고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춘천 수리업체를 하나씩 검색해 전화를 돌렸는데, 다행히 오전에 시간이 되는 수리 기사님을 찾았다. 그래도 고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 대비를 해두어야 했다. 가게 문을 열 무렵 기사님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온수기를 완전히 해체한 뒤에야 물이 새는 원인이 밝혀졌다. 노후한 플라스틱 연결고리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깨진 것이다.
“이 온수기는 시중에 별로 없는 제품이라 부품이 거의 없어요. 일단 제가 가져온 걸로 끼워보긴 할 텐데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네요.”
기사님 우려와는 달리 다행스럽게 호환이 되었다. 옆에서 숨죽인 목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작은 연결고리 한두 개 교체하는 수준이었지만 기기를 해체하고 조립하느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더 추워지면 온수기 연결하는 관부터 얼 거예요. 그거 얼면 답도 없어요. 미리 준비 잘하셔야 할 거야.”
춘천 온 지 아홉 달 밖에 되지 않았다는 나의 말에 기사님은 이런저런 조언을 보태어 주셨다. 수리비 8만 원을 내고 기사님을 배웅해드린 뒤 가게로 돌아오며 중얼거렸다.
“겨울이야. 겨울이 왔네.”
첫서재 문을 열지도 않았던 지난해 겨울의 혹독한 가르침을 기억한다. 정수필터가 터져서 가게가 물바다가 되고, 화장실 변기까지 얼어서 깨져버렸던 겨울. 큰돈과 시간을 들여 고쳐놓은 집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했는지, 처음으로 후회가 밀려오던 날들이었다. 그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우리 앞마당은 똑똑해서 숫자를 읽는 능력이 있는지 달력이 11월에서 12월로 넘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갈라진 틈새마다 살얼음을 틔웠다. 좁은 실내에 딱히 놔둘 데가 없어 뒷마당에 세워둔 밀대걸레들도 시나브로 얼어 제 기능을 잃어갔다. 지난해에도 혹한을 체감했지만, 그때는 그나마 서울에 살다가 주말에만 첫서재를 오가는 수준이었다. 춘천의 한 겨울을 매일 곱씹어 소화하는 첫 경험은 지금부터 막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봄을 이름에 품은 이 도시에서 아홉 달을 보내면서 가장 발달한 몸의 기능이 있다면 그건 계절을 느끼는 감각세포일 것이다. 서울에서 계절은 대비하는 대상일 뿐, 감각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더워지면 반팔을 입고, 선풍기와 에어컨을 틀으면 됐다. 추워지면 옷을 껴입고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면 됐다. 안경에 김이 자주 서리는 불편함 정도만 감수하면 그만이었다. 가끔 찾아오는 봄과 겨울이 반가웠지만 몸이 저릿하기도 전에 떠나버렸다. 서울에서의 계절은 사계절이지만 한 계절이기도 했던 셈이다. 늘 비슷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데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는 도시였고 나도 그랬으니까.
이곳 첫서재에서의 삶은 다르다. 계절의 변화 마디마디를 박박 긁어내듯 감각하게 된다. 매일 여덟 시간씩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앞마당 라일락 나무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고,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노래졌다가 떨어진다. 파리들은 봄과 가을마다 유리창에 하얀 똥을 묻혔다가 여름과 겨울이 되면 귀신 같이 사라진다. 봄에는 벌이 찾아오고 여름이면 땅 밑 벌레가 늘어난다. 정오마다 찾아오던 참새 무리가 점점 지각하기 시작하면 그제야 가을이다. 그리고 나무 천장이 수분을 뱉으며 잔뜩 웅크리느라 미세하게 서로의 틈을 벌리면, 그 사이로 찬 바람과 함께 겨울이 스며든다. 아무리 전열기구와 온풍기를 켜 두어도 발목 아래가 시릿하다. 처음엔 그마저도 따뜻하게 할 방법을 골몰했지만, 이내 ‘겨울이니 발목 아래 정도는 시리게 놔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체념이 아닌 수용이다. 계절에 맞서지 않고, 계절을 머금고 살고 싶어서 말이다.
내일은 서재가 문 닫는 월요일이다. 12월의 첫 휴일인 만큼 대청소와 함께 겨울맞이도 할 요량이다. 땅 밑에 파놓은 수도관 계량기에 이불을 욱여넣고, 수도꼭지마다 두꺼운 포목으로 돌돌 말아주어야 한다. 앞마당 화분들도 들여놓거나 집으로 잠시 피신해주어야지. 또 무슨 채비를 해야 할까, 창밖으로 옛 성당 첨탑 끝에 걸린 하늘을 바라보며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39년 전 여름에 태어났으니 내겐 마흔 번째 겨울이지만, 어쩌면 나는 지금 막 생애 첫겨울을 삶에 초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