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드릴까요?'
공간 이용을 마친 손님들이 신용카드를 내밀면, 나는 으레 묻는다. 나의 공유서재 첫서재는 이용요금을 후불로 받는다. 충분히 읽고 쉬다가, 나가면서 음료와 공간값을 함께 결제하는 방식이다. 영수증을 드리거나 버리는 일이 손님과의 마지막 의사소통인 셈이다. 그렇게 물으면 손님 중 열에 아홉은 ‘괜찮다’고 한다. 나는 바로 단말기에서 ‘영수증 미출력’ 버튼을 누른다. 보통 손님용과 가게 보관용 영수증 두 장이 연달아 나오는데, 손님이 안 받겠다고 하면 보관용 한 장만 출력이 된다.
지난해 봄 첫서재 문을 열고 몇 달간, 나는 그렇게 출력된 영수증을 매번 한참 그대로 단말기에 놓아두었다. 그러다 손님이 가게 문을 완전히 열고 나간 뒤에야 비로소 뜯어내어 휴지통에 버렸다. 영수증은 뜯어낼 때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하찮고 불필요한 종이쪼가리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인데, 그가 듣는 데서 북북 찢고 싶지 않았다. 뭐든 찢기는 소리는 유쾌하지 않으니까. 만에 하나 등 뒤로 그 소리를 듣고 뜻모를 불쾌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
몇 달을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다른 차원의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혹시 손님이 오해하면 어떡하지?’
고 작은 영수증에 담긴 별 거 아닌 개인정보로도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나름대로 배려하는 마음이었는데, 돌아선 손님은 ‘왜 내 개인정보가 담긴 종이를 바로 찢지 않지?’라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처음엔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영수증을 달라고 하셨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이 한구석이 계속 찝찝했다. 혹시 소심한 마음에 그런 의심을 품고도 말 못하고 가셨거나, 당연히 찢어버릴 줄 알았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찜찜하게 떠난 손님도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누구에게도 일말의 불안도 주지 않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 뒤로는 단말기에서 ‘츠-익’하고 영수증이 출력되자마자, 돌아서는 손님 등 뒤로 일부러 더 북북 소리를 내며 찢었다.
그렇게 몇 달을 다시 흘려보냈다. 그사이 적어도 수백 명이 자신의 영수증 찢는 소리를 강제로 확인 당하며 가게 문을 나섰을 것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러던 나는, 어느새부터 다시 영수증을 손님이 나갈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가 버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생각이 다시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 영수증을 손님 가실 때까지 찢지 않았던 것은 ‘배려에 기반한’ 행동이었다. 아마 내가 그걸 찢든 놔두든 거의 모든 손님들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기분이 나쁠 한두 손님을 위해, 나는 모두에게 그렇게 해왔다. 그러다 내가 영수증을 바로 찢어버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오해에 기반한’ 변화였다. 나의 배려를 오해할 한두 손님이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에게 행하던 배려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기분 나쁠 손님이 생긴다면, 배려를 오해 받기보다는 그냥 찢는 소리를 확실히 들려주는 편이 차라리 나아 보였다. 만에 하나 오해가 생기면 풀 수도 없는 상황을 고려해 지극히 자기방어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오해받을까 봐 배려를 포기한’ 경우, 그러니까 ‘남 기분 나쁜 것보다 나 의심 받는 게 더 걱정돼서’ 내가 행한 행동을 합리화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마 기억나지 않는 순간까지 더하면 사회생활하면서 그런 적, 꽤 많았을 테다.
그게 싫었다. 치열한 직장생활을 잠시 멈추고 스무 달 휴직을 위해 떠나온 이곳에서조차, 일말의 의심이라도 받기 두려워 움츠러드는 내 모습이 우스워보였다. 적어도 서투름과 다정함을 실컷 쌓고 싶어서 만든 이 공간에서만큼은, 직장 다닐 때와는 다르게 오해보다 배려에 기반한 생각대로 실천하면서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방식대로 다시 영수증을 손님 등 뒤에서 찢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나의 공간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가 종이를 북북 찢거나 구기는 소리가 아니길 바란다. 조그만 소리로도 마지막 떼는 발걸음까지 배웅하는 공간이고 싶다. 오해받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걱정은, 이해해줄 거라는 더 막연한 믿음으로 삼켜내기로 했다.
물론 십중팔구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에겐 이곳에서 다듬고픈 삶의 결이 있다. 이제껏 과도한 경쟁체제에서 엉켜 살아오면서 나를 지키겠답시고 엉겁결에 누군가를 할퀴었던 기억이 많다. 인생에 리셋 버튼이 있다면 깨끗이 지워내고 싶은 순간들이다. 마음 가다듬고 차분하게 사는 이곳 춘천에서의 생활만큼은, 미세한 소리 하나로도 누군가의 감각을 해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마음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떼어내어 고이 서울로 데려가고 싶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니까, 손님이 완전히 떠날 때까지 단 몇 초 기다리는 일이야 언제든 기꺼이 할 수 있다. 이제껏 살면서 안 그랬으니 앞으로라도, 적어도 첫서재를 문 닫기까지 단 스무 달만이라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