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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Dec 17. 2018

취준생의 고약한 취미와 그 결말

네팔 카트만두 / 시간 잇기 대작전

2009년 9월 26일 새벽 2.


두 평 남짓한, 이를테면 성인 남자 두 명이 누우면 꽉 찰법한 자취방 책상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방에는 노트북 모니터에서 반사되는 불빛만이 어스름했다.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구글 어스’로 실컷 탐닉한 어떤 시장에 관한 글. 네팔 수도 카트만두 중심에 있는 더르바르 광장과 재래시장 이야기였다. 


가보지도 않은 곳에 대해 글을 쓰다니. 우스워보이지만 일탈 같은 취미였다. 구글 어스가 보여준 거기는 내가 상상하던 중세 시대 제3세계 바자르(시장)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개와 소, 사람이 뒤엉켜 다니는 곳. 잡다한 물건을 파는 가게와 노름판이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고, 소싸움이 벌어진 골목에선 사람들이 즉흥 내기를 걸기 바쁜 곳. 이런 정돈되지 않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이국의 시장에 한 번쯤 서 있고 싶었다. 가지런해야 했던 일상의 강박 때문이었을까. 어지럽고 산만해도 그만인 곳이 고팠던 시기였다. 그런데 구글 어스를 뒤지다, 우연히 내 맘에 쏙 드는 바자르를 발견한 거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나는 메모장을 열고 서둘러 글을 적었다. 모니터 속 흐린 풍경을 선명히 기록하기 위해.


스물여덟 살의 ‘재취업’ 준비생. 한 달 전 첫 직장을 관두었던 나는 내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아침, 한 언론사 입사전형인 필기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구글 어스를 몇 시간째 탐닉했던 셈이다. 게다가 시험과 무관한 글을 새벽까지 부단히도 끄적이다니. 한심해보일 수도 있지만, 오래된 습성이었다. 현실의 압박이 커질수록 정신세계는 멀고 깊은 어딘가로 도피시켜 고이 간직해두기. 쉽게 말해 현실도피. 당장 필기시험이 반나절 앞으로 다가오자, 평소 습관처럼 공부 대신 공상여행에 나선 거다. 그 습성, 고치려 노력해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노력하진 않았던 것도 같다.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나만의 별난 방식이었으니까. 일단 공상을 한 다음, 나의 공상이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으로 오늘을 버티어내는 식이었다.


한창 대학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이 코앞에 다가오기만 하면 쫓기듯 세계지도를 검색했다. 그리고 어느 도시의 어느 지점을 콕 찍었다. 거기까지 가는 가장 싼 항공권을 찾고, 그곳에서 볼거리, 먹을거리, 잘 곳을 두루 살폈다. 당장 가지도 않을 거면서. 돈도 없으면서. 이것저것 계획을 조립하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리고 얼핏 여행의 얼개가 맞추어지면, 부랴부랴 ‘내가 미쳤지’를 중얼거리며 다시 시험공부에 돌입했다. 그 시간에 시험공부를 더 했으면 분명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까? 산술적으로는 당연한 얘기지만, 난 왠지 그렇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고약한 습성에 IT기술이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구글 어스의 탄생이었다. 처음 구글 어스를 다운로드한 순간 나는 구글 회장, 아니 신에게 감사했다. 전 세계 지도를 실사로 보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위성으로 쏘는 최근 모습을. 인류로 치면 불과 컴퓨터를 발명한 역사의 변곡점이랄까. 적어도 내 공상여행의 시시한 역사에서는 그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마우스를 요리조리 운전해가며 구글 어스를 샅샅이 뒤졌고, 그럴수록 상상은 정교하게 시각화됐다. ‘가고 싶은 여행지 목록’은 몇 군데에서 몇 십 군데로 훌쩍 늘어났다.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사막부터 아르헨티나 보카후니오르스 축구경기장까지, 13인치 모니터 속 위성을 타고 두루 섭렵했다. 이 달콤한 시간낭비는 꼭 당장 해야 할 것들이 쌓일수록 날 자극하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2009년 9월 26일 새벽 2시, 언론사 필기시험을 몇 시간 앞둔 지금 같은 순간처럼.


어쨌든 한 번 써 내린 글은 끝을 맺어야 했다. 나는 구글 어스 등으로 섭렵한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과 재래시장 풍경을 한참 묘사한 뒤, 마치 이미 그곳에 서 있는 양 이렇게 글을 갈무리했다.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내가, 컴컴한 자취방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현실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 아,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 언젠가 현실 속에서 내가

사진으로 넉넉히 봐둔 저 너저분한 시장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면.

낯설음과 낯익음이 교차하는 기분은 정말이지 짜릿할 거다.

아마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컴퓨터 화면으로 이 시장을 감상하고 있는 과거의 나에게 다가가 속삭여주고 싶겠지.

"어이, 넌 언젠가 저기 서 있게 될 거야. 그러니 즐겁게 살고 있으라고." >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다.

.

.

.

2011년 3월 27일 오후 3.


직장을 갖게 된 이후 처음으로 혼자만의 휴가를 얻은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기사아저씨에게 외쳤다.


“더르바르 플라자.”


덜컹거리는 창문을 손님이 붙잡고 타야하는, 믿어지지 않게  낡아빠진 택시였다.

“카트만두는 매연이 심해요. 창문을 잘 잡고 있지 않으면 기침이 날 거예요.”

택시기사는 이런저런 충고를 했지만 섬세하게 듣지는 못했다. 이미 마음이 택시 바깥에 있던 까닭이다. 제3세계 저개발국가의 수도가 늘 그렇듯 교통체증은 일상적인 분위기였다. 얼추 10km도 되지 않을 법한 거리를 가는데 족히 40분은 걸렸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하릴없는 여행자고, 늦든 이르든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할 테니. 흐리멍덩한 하늘 위로 붕 뜬 마음이 자꾸만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한없이 가벼운 눈송이들이 중력에 이끌려 하늘 위로 나부끼듯이. 애써 마음을 부여잡는 사이 택시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기사에게 꾸벅 인사한 뒤, 내려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미 몇 번 와본 길이기도 했다.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고르지 못한 땅바닥에 캐리어가 쉴 새 없이 덜컹거리는 게 꼭 주인 맘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과 소와 개가 엉켜 너저분한, 이국의 시장 한가운데 섰다.


아무도 모르지만 오직 나에게만은 벅찬 순간이었다. 분주하게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정지돼 있는 기분. 난생 처음 왔지만 낯설지 않은 곳. 낯설 수 없는 곳. 13인치 노트북 모니터에서 꼼꼼히 둘러보았던 그곳. 소싸움도 벌어지지 않았고 노름판도 없었지만, 붉은 힌두사원과 노대에 진열된 국적 불명의 물건들과 빼곡한 이국의 눈동자들로도 충분했던 곳. 


눈을 감고, 1년 반 전 과거를 소환했다. 숨 쉬는 게 용할 만큼 독한 매연과 귀를 괴롭히는 오토바이 경적도 내 타임머신 엔진을 멈추지는 못할 것이었다. 닫힌 홍채 깊이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오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믿는 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봐, 내가 그랬지? 넌 언젠가 저기 서 있게 될 거라고. 생각보다 금방이야. 정확히 1년 반만 즐겁게,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즐겁게 살고 있으라고.”


눈을 떴다. 뿌연 하늘 위로 무언가가 슝, 지나갔다고 믿는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크게, 최선을 다해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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