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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an 12. 2019

천국열차에 오르다

스리랑카 하푸탈레 가는 길


빳빳한 하늘색 물감을 뒤집어 쓴 열차가 너와 나에게 다가왔다.


오후 두 시. 농익은 하늘. 그 하늘을 닮은 열차는, 와 나를 하늘이 가까운 마을로 데려갈 것이었다. 열차에 올라타는 기분은 마치 신을 만난 소년처럼 부풀어 올랐다. 인도 대륙 아래, 눈물방울처럼 생긴 작은 나라의 낡은 기차역 플랫폼에서의 일이다.


열차가 출발한 곳은 '캔디'라는 달콤한 이름의 도시. 종착지는 요정이 살 것만 같은 이름의 깊은 산 속 마을 ‘엘라’였다. 너와 내가 내릴 동네는 그 중간 어딘가, ‘하푸탈레’다.


철길에 녹이 잔뜩 슬었는지 열차는 멈추거나 출발할 때마다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끼어억. 끼어억. 기지개를 펴듯 게으르게 출발하는데 그 시끄러운 마찰음이 부들부들하게 귓등을 울렸다.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는 소리는 소음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열차는 신기할 만큼 가파르게 놓인 철로를 타고 엉금엉금 산을 넘었다. 얼마나 느리던지, 너와 내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해도 크게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툴툴 털고 일어나서 다시 올라 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뜀박질하는 아이보다도 느린 열차였으니까.



열차가 높이 오를수록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들은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느 지점부터는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하늘과 흩어진 구름, 그리고 홍차 이파리들뿐인 세상이었다. 여름에 우기까지 맞아 푹 익은 홍차 잎잎이 산비탈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한 움큼 따서 꼭꼭 씹으면 입 안이 싱그럽고 씁쓸한 향으로 가득 찰 것만 같은 빛깔들. 그러다 바람이 불면 소복했던 초록들이 일제히 군무를 추며 일렁였다.


와 내가 자리했던 열차 2등석에는 맑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만 타고 있었다. 마치 캔디역 개찰구에서 역무원이 탁한 마음들을 전부 걸러낸 것처럼. 밀도 높은 객실에는 거짓말처럼 상쾌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외국인이란 이유로 너와 나에게 서로 좋은 자리를 양보해주려는 사람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마치 그런 규칙이라도 있는 듯 환히 웃어주는 어르신들. 존재로 마음을 씻겨주는 아이들. 그들 틈에 섞여, 약간의 인간냄새를 맡으며 기차여행을 하는 건 분명히 이제껏 누려보지 못한 특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귀하게 대우받는 기분이라서.


기착지에서 먼저 내린 옆자리 아이.

열차 속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린 철길을 즐겼다. 누군가는 창문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고는 찻잎 냄새를 맡았고, 와 나는 활짝 열린 열차 이음새에 쪼그리고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고 음악을 듣다가, 귀를 열고 바람소리를 듣다가, 가끔 졸다가. 슴벅이던 네 개의 눈동자에 담긴 하늘은 몇 분을 멀다하고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되풀이했다. 질투어린 연인의 눈매처럼. 아이처럼.


그러다 산 속 터널로 들어서면서 하늘이 꼼짝없이 사라지면, 얌전하던 승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소리를 내질렀다. 육중한 엔진 소리와 승객들의 환호성, 아이들 발 구르는 소리가 하나의 힘처럼 뒤엉켜 어둠을 힘차게 밀어냈다. 터널을 지나 다시 빛의 세상에 이르면 그 소리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열차 속 세상이 일상이라면 터널 속 세상은 일탈이었다. 그 일탈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다음 터널이 어서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다섯 시간이 그렇게 동화처럼 흘렀다. 조금도 불행하거나 때묻지 않은 시간이었다. 열차는 하푸탈레에 정차했고, 우린 내려야 했다. 시간을 되감을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그랬을 텐데. 정해진 기간 휴가를 떠나온 직장인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여행자였다면 아마 우린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너와 나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열차는 떠났다. 천국처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배웅하며, 속없는 걱정이 앞섰다. 너와 나는 살다가 이런 다섯 시간을 다시 조우할 수 있을까. 까만 터널의 환호성과 초록바다의 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쌉싸래한 냄새는 또 언제까지 기억하려나.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좋을 거야. 걱정은 무슨.


그런데 이 열차가 데려다 준 여기는 어떤 곳일까. 천국열차니까, 여기가 천국인 건가?


열차가 데려다준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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