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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Apr 27. 2019

"저긴 어디지?"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여행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가마쿠라 따라잡기


‘저긴 도대체 어디지?’ 싶은 영화가 있다.

영화 보는 내내 주인공보다 배경에 더 눈길이 가는 영화. 대사보다 영상으로 각인되는 영화 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다. 배다른 네 자매가 부모마저 떠난 집에서 함께 머물며 서로를 치유하고 커가는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이라니 내용도 모른 채 영화표부터 끊었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광화문 씨네큐브를 나서면서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저기 어딘데, 저리 예쁘지? 가보고 싶다. 2016년 4월이었다.

일본 가마쿠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이번까지 세 차례 여기 머물렀다. 다만 이번에야 ‘영화 속 그곳들’에 가볼 수 있었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마쿠라 여행의 사흘째.

눈뜨자마자 볕의 양부터 가늠해야 할 아침이었다. 이틀 내내 날씨가 탁했던 터라 주로 실내에만 머물렀다. 오늘마저 그러면 안 되는데. 다행히 북쪽으로 창을 낸 방이 오늘은 유난히 커 보였다. 이 정도면 하루가 내내 환할 것이었다.


미리 캡쳐해두었던 사진들을 스마트폰에서 꺼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영화와 만화책 속 명장면들. 이제 그곳이 어딘지 하나씩 알아내면 된다.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둔 데도 있었고, 알쏭달쏭한 곳은 숙소 주인장에게 물었다.

목적지의 좌표를 찍어두고서, 자전거 한 대를 숙소에서 빌렸다. 바퀴가 작고 기어 변속은 둔하지만 그래도 색깔만큼은 유채꽃처럼 화사한 노란자전거. 잘 부탁해. 출발이다.



<바다고양이 식당>


여기 가장 먼저 오고 싶었다. 배고팠으니까.


영화에서 네 자매가 내내 들렀던 식당이자 막내 스즈의 축구부 <쇼난 옥토퍼스> 부원들이 단체회식을 하던 곳. 거기서 먹던 시라스동(멸치덮밥) 맛이 얼마나 궁금하던지.


영화 속 문좌식당.


바다고양이 식당은 영화 속 이름이다.


지금은 한자로 ‘문좌식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마쿠라의 끝섬 에노시마의 구석진 에 자리 잡고 있다. 너무 일찍 가면 낭패다. 이른 점심을 먹으려던 나도 문을 열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영화에서 축구부 단체 회식 장면(위). 내가 갔을 땐 소년들 대신 동네 어르신들이 식사 중이셨다(아래).

영화와 달리 문좌식당에서는 생멸치회덮밥을 팔지는 않는다. 익힌 멸치덮밥과 각종 덮밥류를 파는데, 맛은 영화만큼 각인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날 들렀던 바로 옆집이 더 맛있던데.) 결코 맛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화 속앉아있다는 감흥에 취해 맛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하 편이 사실에 가깝겠.


문좌식당의 시라스동.




<고쿠라쿠지역>


네 자매의 출근 혹은 등굣길이었던 전차역. 가마쿠라의 명물인 동네 전차 ‘에노덴’을 타고 내리는 곳이다.

에노덴은 슬램덩크, 츠바키 문구점 등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기껏해야 4량 정도 되는 아담한 전차가 동네의 좁은 길목을 요리조리 잘도 누비고 다닌다. 에노덴만 타도 가마쿠라의 산과 바다, 동네, 사찰까지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저 몸 담는 것만으로도 맘이 동하는 전차다.


영화에서 스즈가 뛰던 자리(위)엔 어린아이들이 하교 중(아래)이었다.


고쿠라쿠지역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어 자전거로 가려면 허벅지 힘을 꽤 써야 한다. 물론 어렵게 오른 언덕일수록 감상하는 맛이 .


정갈한 초록색 간판, 빨간 우체통까지 그대로다.


역 코앞에는 지각하는 장면마다 등장했던 붉은 다리와,



스즈가 비를 피해 앉아있던 처마도 그대로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되어 이런 것까지 따라 하는 기분이… 상쾌했다고 한다. 아무도 안 보는데 뭐




<네 자매의 집>


영화 속 네 자매의 집을 찾고 싶었다. 창이 얇아 겨울엔 함께 오들오들 떨 여름이 되면 앞마당에서 싱그러운 매실을 따던 그 집. 고쿠리쿠지역에서 출근하고 등교했으니 여기 어디일 거야.

캡쳐해둔 사진을 한 손에 들고, 느리지만 화사한 유채꽃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샅샅이 누볐다. 결국 비슷한 골목은 찾았지만 그 집은 없었다.


영화 속 스즈는 항상 뛰고 있구나(위). 주변 건물 모양과 간판을 보면 아래 사진 파란색 지붕 집을 세트장으로 개조했던 것 같다.


아마도 세트장이었던 모양이다. 주변 싱크로율을 맞추어 보면 이 골목이 분명한데.



대신 자매가 산책하던 사찰의 숲길은 찾아냈다. 직 봄이라 녹음이 덜 여물었지만 분명 그 길이다.




<카라모치야 과자점>


스즈의 단골 과자집. 영화엔 나왔던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만화에서는 자주 봤다.


이 가게에서 쇼난 옥토퍼스의 주장 후타가 스즈에게 가면 모양 만쥬에 대해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저씨 마음에 얼마나 봄바람이 던지.


바로 그 가면 모양 만쥬. 만화에서와 달리 홀로 두 개 다 먹었다.


맛집으로 유명한지 평일 낮에도 손님이 많았다. 만쥬와 화과 몇 개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고토쿠인 대불상>


만화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들렀던 곳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만화에서는 소년소녀의 뒷모습이었는데, 노부부가 마침 그 자리에 서 있어 뒷모습을 찍어봤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찍었는데 뒷모습이니 괜찮겠지. 노심초사하긴 하다.




<시치리가하마 해변>

영화 속 네 자매.


마지막으로 해변.


영화에서 산과 바다는 상징적이다. 주로 누군가가 용기를 낼 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될 때는 산을 오른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네 자매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스즈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곳도 산 정상이다.


산이 이야기를 터뜨리는 공간이었다면 바다는 이야기를 모으고 담는 곳이었다. 사람을 정리할 때, 한 단락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주인공의 시선 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산에서는 주로 아버지, 바다에서는 주로 가족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감독이 산과 바다를 어떤 의미로 가슴에 두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영화의 엔딩 컷(위)과 실제 찍은 해변.

엔딩 장면 역시 네 자매가 해변을 걸으며 마무리된다. 바로 이 해변에서.

이날 저녁숱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영화 같은 하루를 엔딩하고 있었다.





영화 속 그곳들을 쫓아다녔던 나의 하루도 엔딩.


유채꽃자전거를 반납하고, 최대한 대충 씻고, 침대에 누우니 청량한 피로감이 머리맡으로 쏠렸다.


선명하게 행복한 밤이었다. '여행''목적'은 어울리는 이 아닌 듯하지만, 분명한 목적을 두었던 이날 여행의 끝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오랜만에 페달을 실컷 돌려댄 허벅지가 좀 쑤시긴 했어도 행복감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니 여행하는 내내. 가마쿠라는 영화를 닮아 행복의 소근육들을 소소히 꿈틀이는 마을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영화와 만화로 한 번씩 더 봐야지. 사랑하던 무언가를 한 뼘 더 사랑하게 된 기분이다.


혼자 보기 아까웠던 가마쿠라의 노을. 여기 나눕니다.


#바닷마을다이어리 #고레에다히로카즈 #일본영화

(조촐한 글이지만 공유해가실 땐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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