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긴 도대체 어디지?’ 싶은 영화가 있다.
영화 보는 내내 주인공보다 배경에 더 눈길이 가는 영화. 대사보다 영상으로 각인되는 영화 말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그랬다. 배다른 네 자매가 부모마저 떠난 집에서 함께 머물며 서로를 치유하고 커가는 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이라니 내용도 모른 채 영화표부터 끊었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광화문 씨네큐브를 나서면서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비행기표를 검색하고 있었다. 저기 어딘데, 저리 예쁘지? 가보고 싶다. 2016년 4월이었다.
일본 가마쿠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이번까지 세 차례 여기 머물렀다. 다만 이번에야 ‘영화 속 그곳들’에 가볼 수 있었다. 넉넉히 시간을 두고 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마쿠라 여행의 사흘째.
눈뜨자마자 볕의 양부터 가늠해야 할 아침이었다. 이틀 내내 날씨가 탁했던 터라 주로 실내에만 머물렀다. 오늘마저 그러면 안 되는데. 다행히 북쪽으로 창을 낸 방이 오늘은 유난히 커 보였다. 이 정도면 하루가 내내 환할 것이었다.
미리 캡쳐해두었던 사진들을 스마트폰에서 꺼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영화와 만화책 속 명장면들. 이제 그곳이 어딘지 하나씩 알아내면 된다.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둔 데도 있었고, 알쏭달쏭한 곳은 숙소 주인장에게 물었다.
목적지의 좌표를 찍어두고서, 자전거 한 대를 숙소에서 빌렸다. 바퀴가 작고 기어 변속은 둔하지만 그래도 색깔만큼은 유채꽃처럼 화사한 노란자전거. 잘 부탁해. 출발이다.
<바다고양이 식당>
여기 가장 먼저 오고 싶었다. 배고팠으니까.
영화에서 네 자매가 내내 들렀던 식당이자 막내 스즈의 축구부 <쇼난 옥토퍼스> 부원들이 단체회식을 하던 곳. 거기서 먹던 시라스동(멸치덮밥) 맛이 얼마나 궁금하던지.
영화 속 문좌식당.
바다고양이 식당은 영화 속 이름이다.
지금은 한자로 ‘문좌식당’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마쿠라의 끝섬 에노시마의 구석진 길에 자리 잡고 있다. 너무 일찍 가면 낭패다. 이른 점심을 먹으려던 나도 문을 열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영화에서 축구부 단체 회식 장면(위). 내가 갔을 땐 소년들 대신 동네 어르신들이 식사 중이셨다(아래). 영화와 달리 문좌식당에서는 생멸치회덮밥을 팔지는 않는다. 익힌 멸치덮밥과 각종 덮밥류를 파는데, 맛은 영화만큼 각인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날 들렀던 바로 옆집이 더 맛있던데.) 결코 맛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 속에 앉아있다는 감흥에 취해 맛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겠다.
문좌식당의 시라스동.
<고쿠라쿠지역>
네 자매의 출근 혹은 등굣길이었던 전차역. 가마쿠라의 명물인 동네 전차 ‘에노덴’을 타고 내리는 곳이다.
에노덴은 슬램덩크, 츠바키 문구점 등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기껏해야 4량 정도 되는 아담한 전차가 동네의 좁은 길목을 요리조리 잘도 누비고 다닌다. 에노덴만 타도 가마쿠라의 산과 바다, 동네, 사찰까지 빠짐없이 감상할 수 있다. 그저 몸 담는 것만으로도 맘이 동하는 전차다.
영화에서 스즈가 뛰던 자리(위)엔 어린아이들이 하교 중(아래)이었다.
고쿠라쿠지역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어 자전거로 가려면 허벅지 힘을 꽤 써야 한다. 물론 어렵게 오른 언덕일수록 감상하는 맛이 달다.
정갈한 초록색 간판, 빨간 우체통까지 그대로다.
역 코앞에는 지각하는 장면마다 등장했던 붉은 다리와,
스즈가 비를 피해 앉아있던 처마도 그대로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되어 이런 것까지 따라 하는 기분이… 상쾌했다고 한다. 아무도 안 보는데 뭐
<네 자매의 집>
영화 속 네 자매의 집을 찾고 싶었다. 창이 얇아 겨울엔 함께 오들오들 떨고 여름이 되면 앞마당에서 싱그러운 매실을 따던 그 집. 고쿠리쿠지역에서 출근하고 등교했으니 여기 어디일 거야.
캡쳐해둔 사진을 한 손에 들고, 느리지만 화사한 유채꽃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샅샅이 누볐다. 결국 비슷한 골목은 찾았지만 그 집은 없었다.
영화 속 스즈는 항상 뛰고 있구나(위). 주변 건물 모양과 간판을 보면 아래 사진 파란색 지붕 집을 세트장으로 개조했던 것 같다.
아마도 세트장이었던 모양이다. 주변 싱크로율을 맞추어 보면 이 골목이 분명한데.
대신 자매가 산책하던 사찰의 숲길은 찾아냈다. 아직 봄이라 녹음이 덜 여물었지만 분명 그 길이다.
<치카라모치야 과자점>
스즈의 단골 과자집. 영화엔 나왔던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만화에서는 자주 봤다.
이 가게에서 쇼난 옥토퍼스의 주장 후타가 스즈에게 가면 모양 만쥬에 대해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저씨 마음에 얼마나 봄바람이 일던지.
바로 그 가면 모양 만쥬. 만화에서와 달리 홀로 두 개 다 먹었다.
맛집으로 유명한지 평일 낮에도 손님이 많았다. 만쥬와 화과 몇 개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고토쿠인 대불상>
만화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들렀던 곳이었나.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만화에서는 소년소녀의 뒷모습이었는데, 노부부가 마침 그 자리에 서 있어 뒷모습을 찍어봤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찍었는데 뒷모습이니 괜찮겠지. 노심초사하긴 하다.
<시치리가하마 해변>
영화 속 네 자매.
마지막으로 해변.
영화에서 산과 바다는 상징적이다. 주로 누군가가 용기를 낼 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될 때는 산을 오른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네 자매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스즈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곳도 산 정상이다.
산이 이야기를 터뜨리는 공간이었다면 바다는 이야기를 모으고 담는 곳이었다. 사람을 정리할 때, 한 단락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주인공의 시선 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산에서는 주로 아버지, 바다에서는 주로 가족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감독이 산과 바다를 어떤 의미로 가슴에 두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영화의 엔딩 컷(위)과 실제 찍은 해변. 엔딩 장면 역시 네 자매가 해변을 걸으며 마무리된다. 바로 이 해변에서.
이날 저녁도 숱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의 영화 같은 하루를 엔딩하고 있었다.
영화 속 그곳들을 쫓아다녔던 나의 하루도 엔딩.
유채꽃자전거를 반납하고, 최대한 대충 씻고, 침대에 누우니 청량한 피로감이 머리맡으로 쏠렸다.
선명하게 행복한 밤이었다. '여행'과 '목적'은 어울리는 말이 아닌 듯하지만, 분명한 목적을 두었던 이날 여행의 끝은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오랜만에 페달을 실컷 돌려댄 허벅지가 좀 쑤시긴 했어도 행복감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여행하는 내내. 가마쿠라는 영화를 닮아 행복의 소근육들을 소소히 꿈틀이는 마을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영화와 만화로 한 번씩 더 봐야지. 사랑하던 무언가를 한 뼘 더 사랑하게 된 기분이다.
혼자 보기 아까웠던 가마쿠라의 노을. 여기 나눕니다.
#바닷마을다이어리 #고레에다히로카즈 #일본영화
(조촐한 글이지만 공유해가실 땐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