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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n 08. 2019

“우리 따로 삽시다” 분리 사회의 끝은?

<영화 '원령공주'와 노키즈존, 아파트 장벽>

(이 글은 취재후기가 아니라 취재'전'기? 취재동기? 아무튼 그렇습니다..)


20년 전에 봤던 한 영화를 복기했습니다.


일본 지브리의 고전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고딩 때 친구네 집에서 불법 복제 비디오로 봤던 영화였지요(당시는 일본 대중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지 않았을 때였답니다). 


이 영화를 기억에서 꺼내든 이유가 있습니다. 바다는 오물로, 한라산은 쓰레기로, 땅은 시멘트로 가득 찬 제주도를 나흘간 취재하며 원령공주가 그린 죽음의 섬이 떠올랐던 탓입니다. 20년 전 당시엔 그저 꽤 재밌는 영화구나, 자연한테 대들면 안 되는구나, 정도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요. 긴 세월을 거슬러 기억이 되감겨진 걸 보니 그 이상의 울림이 남아 있었나 봐요.


20년 만에 소환된 명작


어쨌든 원령공주를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영화에 나온 섬과 죽어가는 제주도를 꼼꼼히 비교해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게다가 지브리의 3대 명작, 나아가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도 종종 꼽히는 작품이니, 고딩 때 친구들끼리 우르르 보고 잊어버릴 영화는 아닌 것도 같아서요.


그러나 20년 만에 다시 본 영화는 예상 밖 어디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단지 환경문제를 고발한 영화만이 아니더군요. 이렇게 복잡한 함수의 진리를 한 작품에 엮어놓았다니요. 덕분에 제 사고가 그간 얼마나 확장했는지, 어디까지가 제 한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여하튼 20년 전 기억과 달리 영화는 자연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게 아니었습니다(하긴 어디 인간이 자연과 대립할 수나 있는 존재던가요).


영화 <원령공주>의 대사.


서른여덟 살에 재해석한 영화의 주제는 '공존'이었습니다.


넓게 보면 삶과 죽음, 선과 악의 공존, 환경 문제로 좁히면 자연과 인류, 시대극으로 해석하면 옛 문명과 신문명, 종교적으로는 신앙과 과학,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공존과 평등의식까지 한 작품에 버무려져 있었습니다. 원령공주의 배경 섬은 현재의 제주도를 너머 세계 그 자체이며, 어쩌면 인간의 마음 속일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선과 악이 분명한 대립을 이루며 시작하지만, 끝내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구 뒤섞습니다. '인간'을 대표하는 타타라 마을의 촌장 에보시는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지만, 인간에겐 책임감도 크고 따듯한 리더지요. '자연'을 상징하는 원령공주도 인간에게 공격 당하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문명을 살해하는 가해자로 그려집니다.  


영화 속 시시신의 모습


두 번째 관람에서야 눈에 들어온 건 ‘시시신’입니다.


영화 속 세계의 절대자인 시시신은 결코 자연의 편도, 인간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이어지지만 시시신은 그저 질서를 유지하려 할 뿐이죠. 대립조차 세계의 일부라는 메시지를 그의 존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시시신의 목을 자르고 맙니다. 서로 싸워가며 답을 찾는 게 생의 섭리라는 신의 뜻을 거부하고, 자연과 분리되어 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재앙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죽고, 자연과 문명세계 전부 폐허가 되죠.


영화의 세계관은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옳네’ ‘네가 옳네’ 싸우며 사는 것도 공존의 한 단면이지만, 공존 자체를 포기하는 순간 세계의 균형은 깨지고 죽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해서 신은 관대했지만, 죽음 자체를 죽여버리려 하는 인간에게는 죽음을 내린 거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올린 풍경들은 취재를 마친 제주도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물론 파괴되고 있는 제주도와 직결할 내용도 차고 넘쳤지만, 그보다 앞서 떠오른 현상이 있었다는 거지요.


바로 내 집 앞, 근거리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리 사회' 현상에 관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요즘 사람들' 마음 속에서 너무도 쉽게 피어오르는 단절 욕구에 관해서였어요. 지구온난화 시대라는데, 20년 전 처음 원령공주를 봤던 시절에 비해 지금 제 주변의 온도는 도리어 따스함을 잃어가는 듯합니다. 차갑게 '분리'를 선언하는 풍경이 보편화된 탓입니다.


철조망 친 아파트. MBC뉴스 캡쳐.


조금만 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동네 아파트 단지는 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 사이 커다란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아파트 단지지만 '우린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걸 기어코 시각화한 셈이지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소셜믹스 정책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지만, 그마저도 '조금 더 가진 자'에 의해 철저히 거부된 겁니다. 아파트 밖 이웃들의 단지 출입을 아예 막아버린 곳들도 이제 흔합니다. 등굣길 아이들 목소리가 시끄럽다며 지름길에 철조망을 둘러버린 아파트도 있다는군요.



아파트뿐이겠습니까. 노키즈존은 이제 보편적입니다.


저는 아이가 있는 입장이지만 노키즈존 표식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여기는 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는구나, 이 마크가 붙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그나마 아이의 소음이 용인되겠구나 싶어서요(아이 조용히 시키는 일은 결코 뜻대로 되지 않기에...). 어쨌든 '노키즈존'에 대한 찬반 입장은 저마다 일리가 있을 터입니다. 다만 모든 사회가 이런 방식으로 분리를 쉽게 선언하는 순간, 공존의 질서는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노키즈존은 머지않아 '동물금지구역', '노인금지구역', '성별금지구역'을 낳을지 모릅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남을 배려하지 않고 공공 에티켓이 없는 일부 사람들의 탓이 커 보이겠지만, 영화 속 시시신이 관장하던 세상은 그런 사람들조차 삶의 일부로 포용하는 사회였지요.


싸우면서도 살을 부벼가며 조금씩 타협점을 찾아가야 함께 사는 세상일 텐데, 그게 싫어서 아예 선을 긋자고 쉽게 선언해버릴수록 세계는 잘게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분리 선언은 곧 영화에서 시시신의 목을 자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결말은, 영화가 처연하게 보여주고 있죠. 생선뼈 발라내듯 어둠의 그림자를 발라내려는 삶의 행선지는 결국 죽음입니다. 단절은 혐오로, 혐오는 인격 살해로 이어질 테지요. 벌써부터 '틀딱충' '한남충' '김치녀' '맘충' '홍어' 등 인간은 벌레나 냄새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시타카의 질문. 대답은 아마도 "안 싸울 순 없지만 따로 살 수는 없어" 정도가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 아시타카는 공존을 상징하는 존재랍니다.


오른팔에는 자연의 분노를, 왼팔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살죠. 그는 오른팔에 상처를 입고 곧 죽을 운명을 떠안았지만, 서쪽 나라로 향하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자 결국 죽지 않습니다.


자연과 인간, 선과 악,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아시타카의 몸이야 말로 우리 사회가 썩지 않기 위해 다져야 할 기초근육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살려면 어느 정도의 어둠도, 희생도, 죽음의 일부도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의 반대말은 '따로 살기' 같지만, 영화는 공존의 반대말이 '공멸'임을 분명히 합니다. 어둠을 공격하면 어둠이 걷힐 것 같지만 오히려 빛을 잃는다고, 다른 생각들을 거세하면 내 생각조차 소멸된다고 영화는 외치고 있습니다. 정확히 우리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지요.


인간의 리더 에보시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깁니다.


조만간 이런 사회 풍경에 대한 기획보도를 준비해볼 요량입니다. 영화가 선물한 직업적 영감에 감사하면서요.


'우리 따로 삽시다'라고 쉽게 선언하는 사회. 장벽 친 사람들에게 20년 만에 꺼내어 본 영화 <원령공주>를 권하는 마음으로, 기자로서의 의무를 최선의 언어와 영상으로 생산해내고 싶어요.


물론 제 멋대로 해석이었을지도...

<조촐한 글이지만 공유해가실 땐 짧은 댓글이라도 남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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