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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l 07. 2019

엄마는 밥으로 말을 건다

모자지간, 대화 대신.



아마도 사춘기가 빨리 찾아왔던 탓일 게다.

청소년기의 나는 부모와 좀처럼 말을 나누지 않는 아이였다. 제 잘난 맛에 살아서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고, 부모님도 딱히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나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아끼는지, 내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나는 실감하고도 남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게 사랑을 표현했는데, 어머니의 매개는 음식이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글로 표현하려 할수록 보잘것 없어질 만큼 탁월했다. 지금도 내가 웬만한 맛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다 난생처음 본 음식을 먹게 되면, 며칠 뒤에 우리 집 밥상에는 그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만든 것 같아서 따라 해 보니 이렇게 되더라, 고 말하는 어머니의 위엄이란.

서로 말을 잘 나누지 않았던 모자지간에 어머니의 음식은 곧 마음의 수사요, 둘만 감지하는 대화의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건 아니다. 그저 말이 오가야 할 영역을 음식이 대리하고 있었달까. 이를테면 어머니가 음식을 차리면 내가 소화하는 과정이 우리에겐 의사소통이자 감정을 공유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음식을 내어놓고 ‘밥 먹어라’ 소리 지르면, 나는 어머니가 식탁 위에 흘려 둔 애정들을 부지런히 주워 담았다. ‘배운 게 없어 가르쳐줄 게 없다’며 늘 미안해하시던 어머니에게 음식은 당신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콘텐츠였을 터이다. 음식의 온기는 곧 어머니의 품이었고, 내가 집을 포근하게 느낀 거의 유일한 이유였다. 나의 오늘이 어땠는지 어머니는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당신이 모를 나의 오늘은 당신이 차린 음식으로부터 한결같이 응원받고 있었다.

어머니가 밥으로 말을 걸면, 나의 대답도 그러했다.

부엌까지 들리도록 쩝쩝 소리를 내며 먹은 건 당신의 요리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후후 입김을 일부러 세게 분 건 당신이 전한 온기를 체감하고 있음이었다. 많아서 다 못 먹겠다고 투덜거린 건 당신이 내게 얼마나 배불리 정성을 쏟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불룩해진 배를 착착 두드린 건 나의 오늘을 두둑이 채워주셔서 감사하단 신호였다.

나의 텔레파시는 제대로 전해졌을까. 이제껏 확인한 적은 없지만 아마 전해졌을 것이다. 본래 편안함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고, 우린 식탁에서 가장 편안한 사이였으니까. 그리고 그 텔레파시는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유용하게 교신되고 있다.

어머니는 몇 년 전부터 아팠다.

외로움과 싸우는 어머니에게, 어른이 된 나는 어떻게든 살갑게 다가가 보려 애쓰고 있다. 이를테면 음식보다는 말로 대화를 건네는 아들 되기. 그런데 타고난 불효자라 잘 안 된다. 수십 년간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늘어놓지 않던 모자지간이라 여전히 대화의 행간에는 어색함이 주기적으로 감돈다. 그걸 감지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묻는다.

“밥 줄까? 뭐 차려줄까?”

그 순간 어색한 공기는 증발하고, 의식적인 노력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세계가 밀려온다. 우리 둘의 나라에서만 쓰는 모국어로 대화를 재개하는 순간이다. 어머니 표정에 서리었던 뜻 모를 찝찝함도 그제야 사라진다. 어머니는 밥을 해줘야, 나는 밥을 먹어야 오늘의 만남이 개운하게 증명되는 셈이다.

우리의 이런 관계는 온전히 어머니의 희생으로 엮여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엄마를 먹고 자란 사이 엄마는 세월만 먹었는지 몸이 더 야위고 주름만 늘었다. 요즘은 부모님 댁에 갈 때면 차려주신 밥을 먹는 횟수보다 외식 사드리는 횟수를 점점 늘려가고 있다. 아픈 어머니 부엌에 계신 게 안쓰러워서. 하지만 그럴 때마다 편하다곤 하시면서 서운해하시는 어머니의 표정도 매번 마주하고 있다. 이제는 손님처럼 드문드문 찾아오는 아들내미 한 끼 더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겠지. 결국 지금은 집에서 엄마 밥을 먹어도, 나가서 근사한 저녁을 사 먹어도 서로 조금씩 찜찜해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오늘도 나는 매일매일 더 살가운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하고는 실패해버리는 일상을 되풀이하며 살아가고 있다. 밥으로 말을 주고받는 우리 사이에는 타파되어야 할 전근대적 여성상도 있기에, 그걸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으려 애쓰고도 있다. 내 아내와 아들 사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마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밥상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식당에서 음식 맛이 시원찮으면 어머니에게 가고 싶고, 맛집을 발견하면 어머니를 데리고 오고 싶다. 어머니는 며칠 뒤에 ‘이렇게 이렇게 해보니 되더라’며 똑같이 만들어줄 것만 같아서. 아픈 어머니를 두고도 그런 생각부터 하는 타고난 철부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멀어진 당신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은 오직 그렇게 증명된다는 걸. 우리 사이엔 그게 가장 편한 언어이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는 걸.



이런 무더위에는 엄마표 동치미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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