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 공유서재를 차리기 위해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던 참이었다. 내년에 잠시나마 회사를 휴직하고 춘천에 살 생각이라서. 서울사람이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동네다.
좋아하는 동네니 만큼 지난 몇 년간 틈날 때마다 들렀다. 특히 시내의 오래된 골목에 있는 한 카페의 단골이 됐다. 구옥을 개조한 레트로 카페인데, 동네의 낡음을 해치지 않으면서 클래식한 분위기까지 선보여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엇보다 커피가 맛있었다. 혼자 춘천에 갈 때마다 들르려 애쓰거나, 바쁘면 원두라도 사 왔다.
지난달에는 늙은 부모님과 일곱 살 아들까지 온 가족과 함께 춘천을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카페이기에 굳이 시간을 만들어 찾아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저희 카페 노키즈존인 건 아시나요?”
거절의 이유였다.
나는 몰랐다. 어디 SNS에 써놓으셨는데 내가 못 봤던 것도 같았다. SNS를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 어쨌든 주인장이 그러하다니 물러나야겠지. 설렘을 안고 멀리 찾아온 발걸음을 돌리기 전에, 다만 묻고는 싶었다.
“저의 아이는 여기 처음 오는데, 이 아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거라 예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장님(혹은 직원분)이 말씀하셨다.
“다른 아이들이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가 있어서 손님들 항의가 많아서 아이는 받지 않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분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더 묻고 싶었다.
“흑인은 비교적 범죄율이 높지요. 그렇다고 흑인을 출입금지하면 인종차별 아닐까요? 사장님께서 ‘아이들은 떠들 확률이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모든 아이의 출입을 막는다면 그것 또한 차별이 아닌가요?”
...라고.그러나 묻지 않았다.사장님 사정도 어느 정도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카페 분위기를 망치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방치하는 부모들 때문에 속앓이 한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 가족 역시 우리 아이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어느 공공시설을 가든 조마조마한 건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자영업자가 무슨 권력자도 아닌데, 바쁘게 돈 벌며 사시느라 그런 아이에 대해 배려할 여유조차 없으셨을 수도 있다. 복장 규정이 있는 레스토랑도 있는 만큼 그저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비자가 가지 않으면 그만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노키즈존인 줄 알았다면 일부러 찾아가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묻고 싶었다.아무리 ‘다른 손님을 배려해 달라’고 부탁해도 거들떠보지 않고 내 새끼만 챙기는 부모들이 그렇게 정말 많았는지. 아니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얘야, 여기는 조용히 하는 데란다’고 말해본 적은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한두 번 겪어본 뒤 지레 ‘요새 부모들, 애들은 안 돼’라며 성급한 일반화를 시켜버린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인터넷에서 본 몇몇 사례가 마치 내 일처럼 각인되어버린 건 아닌지. 진실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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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뭐든 간에 나는 다시 그 가게에 가지 않을 생각이기에 속이 상했다. 멋진 카페였으니까. 가게 안에는 낡은 88년도 호돌이 컵과 칠성사이다 컵, 오래된 소파와 목재들이 가득했다.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를 지향하는 그 카페는 그렇게 우리 세대의 어릴 적 감수성을 한껏 부추겨놓았지만, 정작 지금의 어린 세대에게는 ‘예비 문제아’ 딱지를 붙이며 내몰았다. 장사하는 입장을 이해하기에 더 이상은 따지지 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다만 뒤돌아오는 걸음에 일곱 살 아들내미가 또박또박 내게 건넨 말은 너무도 아팠다.
“아빠 미안해.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엄마 아빠할머니 할아버지 다 저기 가서 놀았을 텐데.”
거짓말 같이 아이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거듭 말해주었지만 그에게 카페란, 당분간 그런 곳이 될 것이다.
‘우린 너무 쉽게 단절을 택하고 산다.’
차를 타고 돌아오며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안 보면 그만’이라는 태도야말로, 갈등이 생겼을 때 내릴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지일 테다. 젊은 사람끼리, 남자나 여자끼리,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잔뜩 울타리를 쌓아두고 사는 게 가장 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끼리끼리 사는 사이, 우리 시회엔 너무 많은 선이 그어지고 벽이 생긴다. ‘노키즈존’은 ‘노학생존’, ‘노시니어존’으로 확장되고 있다. SNS에서는 정치적 성향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 지어 ‘공유’를 공유하며, 서로에게만 손뼉 치거나 반대 성향의 콘텐츠에 집단으로 공격을 가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그어진 선에, 높게 쌓아 올린 벽에 갇히게 되는 건 결국 우리다. 당장 편하고 싶어 선택한 단절이 나를 고립시키는 건 아닌지, 나아가 사회의 갈등을 증폭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는 걸까.
전국 노키즈존 지도까지 있다. 아이를 막아세운 사장님들도 아이였던 시절이 있을 테고, 누군가의 양보, 배려, 혹은 짐짓 모른체로 어른스럽게 자라났을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애가 시끄럽다고 제 집 문을 닫아버리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아이가 훗날 어긋나게 자랐을 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저 다 부모 책임일까? 닫힌 사회를 만든 건 단절을 쉽게 택한 바로 우리 자신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류의 ‘노XX존’을 반대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차별에더 가깝다.
저마다의 시급한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 길게 보면 사회를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행위에 가담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노키즈존은 당장 나와 우리 가게를 보호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더 많은 ‘민폐 엄마들’과 문제아를 양산할 것이다. 그들을 그들만의 세계로 몰아내면, 더 이상 그들은 ‘나와 다른’ 타인을 위해 에티켓을 지킬 필요도 없어질 것이기에.
물론 장사하시는 분들은 당장의 현실이 급할 터이다. 눈 앞의 생활이 퍽퍽한데, ‘사회구성원으로서 남의 아이를 키우는 데 공동의 의무감이 있다’는 고상한 말이 다가올 리도 없다. 아직 아이가 없기에 공감할 경험이 없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다. 내가 갔던 카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저 나는, 적어도 나부터라도 차별의 유통자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내년에 춘천에서 열 공유서재는 정숙해야 할 공간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아이의 출입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내 가게에 놀러 온 아이가 떠들고 다닌다면, ‘타인을 배려해 달라’며 부모님께 정중히 부탁드려보겠다. 그래도 안 되면 내가 직접 틈을 내 아이와 소통을 시도해보겠다. 그 아이를 키울 책임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인 나에게도 있으므로. 도저히 그래도 안 되거나 ‘우리 아이한테 왜 그러냐’고 되묻는 비상식적인 부모를 만난다면? 그 부모 보는 앞에서 손님들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가시고 난뒤에 시원하게 욕이나 하고 말겠다. 그 부모에 대한 분노로 또 다른 아이를 막아 세우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