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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l 12. 2020

우리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

<여행금지령 시대의 금단현상들>


아무도 여행기를 읽으려 들지 않는 시대에 이 글을 쓴다. 요즘 들어 누군가에게, 때로는 혼잣말로 자주 묻게 되는 말이 있다.


"우리 다시 온전히 여행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데려온 뉴노멀 시대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어디론가 자유롭게 떠날 기회를 박탈당한 현실 아닐까. 그것도 잔인할 만큼 공평하게 전 인류가, 모든 나라를 막론하고.

여행이 사라진 일상이 생소하다. 돈을 스스로 번 뒤로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해왔기에. 그 주기가 길었다 짧아졌다 하긴 했지만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상상은 하지 못했다. 여행의 주기는 차게 식은 일상을 데우는 연료였고, 현실도피의 동아줄이었고, 못난 현실을 곱게 채색해준 색안경이었다. 그런 여행이 예고 없이 인간세계에서 사라졌다. 오염된 하늘의 별처럼. 오후 처럼.

여행할 권리를 갑자기 빼앗긴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뉴노멀의 시대, 나와 같았던 간헐적 여행자들이 낯선 신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의 길로 나뉜 것만 같다.

한쪽 길에는 포기의 정서가 덮친 듯하다. 어차피 못하게 된 여행, 잊자는 마음이겠지. 더 이상 여행기를 읽지 않기 시작하고, 비행기 티켓도, 트립어드바이저와 에어비앤비도 검색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출판계의 풍문으로는 최근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여행책이 단 한 권밖에 팔리지 않은 날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렇게 일상에서 여행을 지워내고 기억을 씻는다. 아마도 현실적이거나, 여행중독지수가 낮은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한쪽 길 위에서는 여행이 사라진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독한 금단현상을 앓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 길 위에 있는 것만 같다. 여행이 습관인지 중독인지 헷갈리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겠다. 습관을 끊는 데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테니까.

초기 증상으로는, 옛날을 질척대기 시작한다. 과거에 찍어둔 여행사진을 밤마다 하릴없이 돌려보거나, 먼 땅의 냄새가 짙게 밴 소품들을 끌어안고 잠들거나, 여행지에서 먹던 음식, 듣던 노래를 찾아 골목을 배회한다. 틈틈이 끄적여놓은 지난 여행일기를 몇 년 만에 들추어 읽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남의 여행에 관심 없던 내가 어느새 누군가의 옛 여행기와 사진까지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여행 다닐 적엔 타인의 여행이야기에 이토록 감정을 내어준 적이 없었는데. 그들의 옛 여행을 뚫어지게 보다 문득 궁금해지곤 한다. 당신도 지금 나와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지.

이 정도에 그쳤다면 다행이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창문 없는 방에 갇힌 듯한 고립감이 밀려온다. 주기적으로 여행을 다닐 땐 일상에서 갑갑한 일이 생겨도 주문처럼 혼자 중얼거리면 그만이었다. 여기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 나는 곧 그 세계를 만나러 간다. 비록 잠시일지라도, 그 상상만으로도 일상에 다시 생기가 감돌았다. 내가 건설한 세상이 작은 방과 같다면, 여행은 굳이 방을 버리고 나가지 않아도 산뜻한 바깥공기를 쐬여주는 창문이었다. 그런데 그 창문이 굳게 닫히니 도리 없이 선택에 내몰리게 된다. 이 세계를 버티든지 탈출하든지. 회사를 다니든지 때려치우든지. 일상을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 뻑뻑한 이분법의 경계에서 정신세계를 윤활해주던 부드러움의 시간이 증발한 기분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여행이 사라지면서 타인에게 더 뾰족해졌다는 거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뜻을 서른이 넘어서야 이해했다. 정신의 곳간을 쉴 틈 없이 채우지 않으면 나를 성찰하기보다 남을 탓하기 쉬워지고, 회사에서도 쉽게 비겁해지거나 뒷담화에나 가담하게 되더라. 여행 역시 내게는 성찰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정욕구. 승리욕. 우월감. 질투... 마음의 정원을 조금만 소홀히 관리하면 금세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 같은 감정들을 주기적으로 싹둑 잘라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닫혔다. 회사에서, 집에서 전보다 더 짜증을 내고 남을 쉽게 비방하는 나를 마주한다. 이러다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까,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




비존재가 되었을 때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행금지 시대의 금단현상에 시달리며 나는 여행에게 새삼 무척 고마워졌다. 지나간 연인이 나를 철들게 했듯, 지나간 여행은 나를 더 풍미로운 인간으로 숙성해준 것만 같아서.

매일 밤 뒤통수를 베개에 묻고 반듯하게 누우면, 하루를 까맣게 태운 천장과 단 둘이 남는 시간이 찾아온다. 사하라의 별밤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천장을 향해 마음껏 지난 기억들을 그려보고는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여행이 있었기에 갇힌 회사 생활 속에서도 열린 인간으로 스스로를 자각할 수 있었다. 여행으로 날카로웠던 삶이 뭉툭해지고, 오염된 정서를 정화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 인정욕구가 발동하면 여행은 제동장치가 되어주었고, 미움의 한기가 체온을 식히면 이불처럼 나를 덮어주었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여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상에 지쳐 '번 아웃'되거나, 회사에서 괴물이 되거나, 도리어 괴물이 되지 못해 속상해하며 살았을 것만 같다. 지금 내 곁에 여행은 없지만, 여행했기에 지금의 나는 반듯하게 존재하고 있다.


여행가고 싶은 등짝.jpg


감사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첫 물음을 되부른다.


그래서, 우린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리고 여행앓이로 속이 타는 모두에게 다독이듯 답하고 싶다. 그 날이 오겠지. 느리게 살다 보면 거짓말처럼 일찍 찾아올지도 몰라.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은 세상과 오롯이 다시 연결되는 그 날이, 거리에서 미친 춤을 추어도 부끄럽지 않을 그 날이, 나와 무관한 작고 시시한 것들을 하루 종일 골똘히 응시해도 괜찮을 그 시간이 꿈처럼 다시 다가오겠지. 그때 새롭게 들이마실 공기는 월급이라는 심폐소생기가 매달 공급하는 산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상쾌할 거야.

주문처럼 중얼거린다. 어서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마음을 한없이 낮추는 어느 이름 모를 골목의 변두리에서 얼른 일상을 위로받고 싶다고. 높다란 언덕에 올라 폐 속까지 시원해지는 풍경을 응시하며, 몸 안에 기생하던 미움의 찌꺼기들을 하루빨리 뱉어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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