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크루즈 14박 15일(04)
기항(寄港)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목적지가 아닌 항구에 잠시 들르다"로 되어 있다.
크루즈가 기항을 하는 이유는 배가 고장나서 수리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유류를 공급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기항하는 김에 배를 정비하기도 하고 기름도 넣겠지만) 주목적은 승객들을 풀어서 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기항지투어'라고 유튜브 등에서는 말하는데 영어로는 소풍이라는 의미의 excursion이라는 단어를 쓴다.
크루즈로 지중해 코스를 간다고 하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다양한 도시를 관광할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큰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기항지 체류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보통, 크루즈는 밤에 움직여서 그 다음날 아침에 새로운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 날 오후 5시나 6시에 배가 떠난다. 즉 시간의 여유가 많지 않다.
기항지 투어 프로그램은 여러 종류가 있다. 7시간 짜리 코스도 있고 서, 너 시간짜리 코스도 있다. 7시간 짜리 코스는 항구에서 버스를 타고 제법 멀리까지 간다. 마르세이유에서 우리 부부는 아비뇽까지 가는 프로그램을 구매했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아비뇽까지는 버스로 2시간쯤 걸리는 거리다. 왕복 4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3시간 정도다.
아비뇽은 '아비뇽의 유수(幽囚)'라고 역사책에 나왔던 바로 그곳이다. 바빌론의 유수를 흉내내서 아비뇽의 유수라고 이름 붙였지만 - 유수는 Captivity라는 뜻이다. 잡혀서 포로가 됐다는 뜻이다 - 실제로는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붙잡혀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형세 판단이었으므로 유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반대학설도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알겠는가, 수많은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고 바로 오늘 일어난 사건에서도 그 내막에 대하여는 설왕설래가 있는 판이니. 하여튼 객관적인 팩트는 클레멘스 5세부터 연이어 7명의 교황이 아비뇽의 교황청(교황궁)에 있었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큰 볼거리였다. 잡혀왔는지, 자발적이었는지, 자의반타의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교황청의 화려함을 볼 때 교황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살았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아비뇽에는 역사가 깊은 다리도 있었다. 물살에 휩쓸려가서 다리가 중간에 끊어져 있는데 그 끝까지 가서 뒤를 돌아 언덕 위에 있는 아비뇽의 교황청과 주변의 경관을 보니까 보기 좋았다.
이런 식으로 배가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기항지 투어를 나간다. 코스타는 이탈리아 선사이고 지중해 연안을 도는 배라서 그런지 몰라도 배의 승객 중 영어를 쓰는 사람은 소수다. 이탈리아 사람이 제일 많고 스페인, 프랑스, 독일 사람들이 그 뒤를 잇는 것 같았다.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거의 없는 듯 했다.
어디를 가나 만나게 되는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도 거의 못 봤다. 그러다가 배를 탄지 닷새인가를 지났을 때 드디어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우리 부부는 아내의 환갑 기념으로 크루즈를 탔는데 그 부부는 남편의 칠순기념으로 크루즈를 탔다고 했다. 좋은 분들이었다. 배에서 가끔 만날 때, 기항지 투어에서 가끔 만날 때 서로 깍듯한 인사를 나눴다.
이렇듯 영어 소통자(우리 부부는 영어를 잘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하는 언어가 영어 뿐이었으니 영어소통자에 속한다)가 적으니까 기항지 투어를 할 때 대형버스 1대 분도 안된다.
따라서 다른 나라 언어를 쓰는 사람과 같은 버스에 탄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사람들이 버스 3대에 타고 자투리 사람들이 남는다면 영어소통자는 그 자투리 이탈리아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게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어떨 때는 이탈리아 사람들과 어떨 때는 독일 사람들과 어떨 때는 프랑스 사람들과 어떨 때는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딱 한 번을 빼고는(그 때는 스페인어를 하는 가이드와 영어를 하는 가이드가 따로 있었다) 가이드 혼자서 2개 국어로 설명을 했다.
놀라운 것은 자국어 빼고 다른 나라 언어 2개, 3개를 유창하게 한다는 점이다. 즉 이탈리아 사람인데 불어, 영어도 능숙하게 구사하는 식이다.
가이드 중에는 스페인어를 하는 것인지, 영어를 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엑센트가 심한 사람도 있었다. 배려심이 있는 가이드도 있었고 대충 시간만 때우는 게으른 가이드도 있었다.
어떤 여성 가이드는 옷차림을 포함하여 외모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으나 언어에 많은 관심이 있는 듯 했다. 내게 다가와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가 한국에 관심이 많다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언어 하나를 배우는데 7개월쯤 잡는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불어, 독어, 스페인어, 영어는 뿌리가 같으므로 즉 문법과 어순이 비슷하므로 빨리 배울 수 있지만 한국어처럼 완전히 다른 문법체계를 갖는 나라의 언어를 7개월만에 배우는 것은 어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여성 가이드의 지적 탐구심은 보기 좋았다.
크루즈는 이렇게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기항을 하려고 하지만 어떨 때는 며칠 씩 항해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 배도 그리스에 갔다가 쉬지 않고 한 번에 스페인의 이비자까지 갈 때는 이틀 반을 기항없이 꼬박 항해했다. 일행들과 와서 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배에 있는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 않지만 바깥에 나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날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 같다.
이렇게 크루즈는 그냥 노는 곳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크루즈는 시설과 이벤트, 기항지투어를 제공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 아프리카나 남미를 가본 적도 없고, 네팔이나 라오스 정글도 가본 적이 없지만 이른바 선진국쪽 여행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넘치도록 했다.
특히 올해에 여행을 많이 다닌 것 같다. 이 번 여행의 소득은, 이제 더 이상 여행의 욕구를 느끼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여행은 돈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활동이다. 골프도 돈이 제법 들지만 여행은 골프보다도 왕창 돈이 든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들고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야 하고 시차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등 피곤하기도 하다.
여행은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실제로 즐거웠고 그러다보니 살아오면서 분에 넘치게 많은 여행을 하였다.
아이들과 외국의 휴양지에서 같이 골프를 하는 일주일 정도의 휴가 여행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더 이상 해외여행을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또 마음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알기란 쉽지 않다. 철학자들이 줄곧 지적하는 바와 같이 타인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으로 착각하면서 살기 쉽다.
그러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은 늘 보잘것 없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번의 여행에서 좀 더 분명히 나의 욕망을 알게 됐다. 크루즈 여행은 나같이 책을 읽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기항하지 않고 계속 바다를 항해했으면 하였다.
크루즈 안에서 세끼 식사를 편안하게 잘 먹고,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곳곳에 열려 있는 Bar에서 내킬 때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해가 질 때는 배의 옥상 갑판에 올라가서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노을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공연이 있으면 극장에 가서 공연을 즐기고, 곳곳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 독서하기 좋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가끔 머리를 들어 바다를 보고..., 너무 좋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려면 굳이 크루즈 여행을 가지 않아도 된다. 시골에 있는 시설이 제법 괜찮은 펜션에 가서 책을 읽다가 주변을 산책하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요즘은 시골에서도 조금만 멀리가면 대형 슈퍼가 있다) 캔맥주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서 마실 수가 있다.
어릴 때 쵸콜렛이 그렇게 맛있었다. 너무 비쌌다. 용돈을 모아서 쵸콜렛을 한박스 샀다. 한꺼번에 거의 다 먹었다. 지겨웠다. 그 뒤로는 쵸콜렛에 대한 욕망이 없어졌으므로 편했다. 섣부른 결론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번 여행에서 쵸콜렛 욕망이 사라질 때와 비슷한 편안함을 느꼈다.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충족하지 못할 때 괴로운 법이다. 명품 가방을 너무 가지고 싶지만 그 가방을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내게는 여행에 대한 욕구가 강했고 그래서 비즈니스 클라스 좌석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고, 일류 호텔에서 잠을 잤으면 싶어서 돈이 더 있으면 했다. 그러나 이제 여행에 대한 욕구조차 소멸되었으므로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