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 변호사 May 23.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독후감

작년에 인왕산을 갔다가 평창동의 영인문학관에 들렀다. 이어령 선생님의 자택 중 지하층과 1층을 영인문학관으로 만들었다. 2층 이상은 이어령 선생님의 부부가 거주하고 계신다고 했다. 영인문학관은 서울대 국문학과 입학동기였던 이어령, 강인숙(교수, 문학평론가, 소설가) 부부의 성함에서 한자씩 따서 이름 붙인 것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현대문학, 문학사상 이라는 월간잡지를 자주 읽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대단한 문학청년이었던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겠다. 그 때는 요즘처럼 블로그 등 읽을거리가 많지 않을 때였다. 나는 문학을 탐해서가 아니라 읽을거리를 좇아 문학잡지를 읽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당시에는 번역판이 없었고 원서 그대로 서점에서 팔았는데 그 잡지 역시 영어가 TIME이나 NEWSWEEK 처럼 난해하지 않았고 이야기가 다채로웠으므로 종종 읽었다.


이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지난 달 고인이 되신 이선생님을, 인터뷰 기사로 유명한 김지수 조선일보 문화전문 기자가 여러 번에 걸쳐 자택으로 방문하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김지수 기자는 조선비즈에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오랫동안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책을 통해서 김지수 기자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꼈다. 이어령 선생님과 인터뷰할 자격(지적 능력과 지적 소양)이 충분히 있었다. 


주제를 정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광대하면서 그 천의무봉한 지식에 읽는 내내 혀를 내둘렀다. 데이터 베이스 같은 지식창고가 아니다. 그 지식들을 엮는 솜씨, 그리고 그 지식을 풀어내는 솜씨가 과연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칭호를 들을만한 분이었다. 


밤새 눈이 소리없이 소복이 내렸다. 우리는 자느라고 몰랐다. 창문 바깥을 본 순간 깜짝 놀란다. 온 세상이 하얗다. "아, 눈이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김지수 기자가 묻는다. “밤사이 내린 눈은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선생님은 대답한다.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막이 내렸다 올라가는 건 일생 중에 그렇게 많지 않거든. 외국 여행을 한다든지,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난다든지……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어제 보던 지붕, 어제 보던 길거리, 어제 보던 논밭이 하얀 바다처럼 변했을 때 세상이 얼마나 찬란한가. 눈 뜨면 달라진 세상, 그런 경이로움을 문학에서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고 하네. 그런 면에서 눈과 비는 느낌이 아주 달라. 비는 소리가 나잖아. 밤새 비 내리면 들창에 사납게 들이치거든. 비에는 경이가 없어. 그런데 눈은? 고요하지. 고요한데 힘이 세."] 


우리가 여행, 특히 해외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설명되었다. 또한 문학 기술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도 내처 설명되었다. 요즘 하고 있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매력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낯설게 하기'의 기술을 발휘해서이다. 


기자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며칠 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전화를 하셨다. 기자는 흥분했다. 누굴까? 


[오래전에 숙명여대에서 신입생을 위한 강연을 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고 했다. 여학생 한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러더군.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네. 그래서 그만 차갑게 툭 던지고 말았지.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그 여학생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슬퍼하며 돌아갔네 선생님, 그래도 돌아가시면 안돼요……’ 하면서. 그 아이는 아마 내 책을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됐겠지. 그런데 한 존재에 깊이 의지하면 ‘이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나거든. 어렸을 때 엄마와 애착이 심해지면 치맛자락 붙잡고 그러잖아. ‘엄마, 나 두고 죽으면 안 돼.’ 그때 어머니가 뭐라고 그래? ‘엄마 안 죽어. 너 두고 절대 안 죽어.’ 그러면 마음이 풀리고 안심이 되지. 아무리 어린애라도 죽는다는 걸 왜 몰라. 그런데 엄마가 ‘너 두고 절대 안 죽는다’ 그러면 그 순간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는 거야. 선생님은 오래전에 스무 살이었던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나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30분 넘게 추위에 덜덜 떨며 당신을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이 말을 했어야 했다고. “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안 죽어.”]


나도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능숙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렇지만 최소한이다. 법률용어를 빌리면 '명백하고 현존한, 중대한 위험'이 닥칠 경우에만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다. 당장의 곤란함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또한 마음에 없는 말은 거의 안한다. 예쁘지 않은 아기보고 예쁘다거나 축하하고 싶지 않은데 축하한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책임질 수 없는 말도 잘 안한다. 여자를 사귈 때 흔히 남자는 하늘에서 별도 따다 줄 것처럼 말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님이 반성하는 위 모습을 보고 저런 의미에서의 허언(虛言)은 경우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말에 모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을 믿는다든지, 영혼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다는 일부 이상한 의사들의 말을 믿는다든지(죽기 직전에 체중을 재고, 죽은 직후에 체중을 재면 수십 그램 의 차이가 나는데 영혼이 육체를 떠났기 때문에 그만큼 체중이 준 거란다.^^), 선생님 자신에게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어서 전화벨이 울리면 누구에게 전화가 오는지 80%는 알아맞출 수 있다든지(진짜 돈 내기 하고 싶다. 확률이 그렇게 되는 건지. 그리고 나도 맞추기는 한다. 전화할 사람이 대충 정해졌으므로) 등등은 과학적 근거 없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도 선생님 특유의 견강부회로 보이는 내용이 내게는 여러 곳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분의 그 탁월한 지성, 문학적 감성에 비할 때 지극히 옥의 티에 불과하다. 


선생님은 용서할 사람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는 용서할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열심히 인사하고, 자기 말을 하지 않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뭐, 이런 사람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말하지만, 실제로는 처세술의 방편으로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정으로 겸손한 태도는 나보다 잘 난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고 의외로 그 숫자도 많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에필로그에 들어서면서 태생적으로 눈물이 없는 내가 울 뻔 했다. 암 말기 환자였던 선생님은 2020년 봄을 못 넘길 줄로 알고 김지수 기자와 제법 오랫동안 매주 화요일마다 생애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렇지만 1년을 더 사셨다. 그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슬펐던 것은 아니다. 살아 계셨다고 하더라도 이 분을 직접 뵐 일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나는 누구를 추앙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이 분이 돌아가신 것 그 자체가 슬픔의 주된 이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그런데 그 책이 끝나가기에 그리고 다시는 선생님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없을 것이기에 영원한 이별의 슬픔을 느낀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분은 치열한 삶을 사셨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무엇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최근에 어떤 소설가가 "문학상 수상이 아니라 소설 쓰는 일상이 더 소중하게 생각돼요"라고 말했는데 같은 뜻이다. 이렇게 사는 분들이 부럽다.

작가의 이전글 닥치고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