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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Aug 21. 2022

노인의 시간 가치

은퇴생활

법률에서는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을 재화(財貨)와 용역(用役)이라고 부른다. ‘재화’는 만질 수 있는 물질 형태로 되어 있는 상품을 뜻한다. 용역은 물질형태로 되어 있지 않는 서비스를 뜻한다. 이삿짐을 대신 옮겨주는 일, 변호사의 변론 등이다.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재화와 용역은 가격을 가지게 된다. 가격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는가(수요), 얼마나 쉽게 구할 수 있는가(공급)에 따라 결정된다. 즉 가격은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을 반영한다. 


수요가 많은 재화와 용역이 반대의 경우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가치와 가격은 비례한다고 볼 수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물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므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급이 풍부하므로 물 값은 싸다. 사실은 형편없는 변호사라도 경력이 화려하면 찾는 의뢰인이 많아서 수임료는 올라간다. 


시장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므로 즉 수요가 없으므로 가격이 형성될 수 없지만 본인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재화도 있다. 아버지의 유품인 오래된 시계, 한 장 밖에 없는 어머니의 사진 등이다. 


시간은 어떨까? 시간은 무한히 공급되므로 현재의 가격은 0원이다. 그러나 만일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일생의 사랑에 빠진 청년이 휴가가 끝나갈 때 며칠 만이라도 시간을 살 수 있다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10년의 시간을 추가로 살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거래되지 않는다. 돈이 절박하다고 하여 신체의 장기처럼 남에게 내다 팔 수도 없고, 돈이 많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시간을 살 수도 없다.


위에서 시간은 공급이 무한하므로 가격이 0원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시간은 공급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게 되므로 죽을 날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노인이 되면 은행의 잔고를 걱정하게 된다. 더 이상 돈을 벌 수가 없는데 살 날은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야 여행도 가고, 멋진 옷도 사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도 있고, 자식들에게도 권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내게 한 달에 월세가 수천만원씩 꼬박꼬박 나오는 빌딩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공상에 빠진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


강남만 해도 한 달에 수천만원씩 월세가 나오는 빌딩들이 수두룩하다. 그 건물주들은 매일, 매일이 신날까? 


물론 부자로 사는 삶이 무조건 좋다. 돈이 많을수록 불행해진다 라는 말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다. 또한 너무 가난하면 무조건 불행하다. 눈뜨면 돈 걱정부터 해야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무 가난하지 않다면 그 다음부터는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의 게임이고 이것은 돈과 무관하다. 수천만원씩 나오는 건물을 몇 개씩 가지고 있어도 사는게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고 먹고 살 정도의 돈만 있어도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있다.


돈은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좋은 차, 좋은 시계, 좋은 집, 좋은 경치... 즉각적인 만족은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므로 즉 수요가 많으므로 그런 재화나 용역은 비싸다. 


좋은 책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좋은 책이 주는 지적인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적 단련을 해야 좋은 책을 즐길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수요가 별로 없으므로 가격은 싸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문장에 감탄하고 저자의 탁월함에 경의를 표하고 때로는 생각에 빠지면서 때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누리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로지 시간만 필요할 뿐이다. 


좋은 책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등산이든, 배낭여행이든, 음악감상이든, 오랜 세월 동안 해당 분야를 파고 들었다면 돈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줄어들어가는 은행잔고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줄어 들어가는 시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충분히 남지 않은 시간이므로 젊을 때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잘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활용할 방안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천할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경우도 있다. 아니, 많다. 그렇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므로 의지를 내도록 하자.


누가 그랬다고 한다. "하루하루는 열심히, 인생은 되는대로 살자" 


노인들에게는 더욱 맞는 말이다. 인생이,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눈 뜨면 오늘 하루 할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다. 책을 읽든, 일본어 단어를 외우든. 팔굽혀펴기를 60개 하든.


텔레비전, 넷플릭스, 유튜브, 신문, 뉴스를 들락날락 하는 것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일 뿐이다. 쉬운 일 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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