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먼나라 이웃나라 여행

Chapter.23

어린 왕자의 집은 창 너머로 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고층 아파트였다. 그는 이 집에서 근 40년째 살고 있었다. 꽤 오래된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유지 보수가 잘 된 덕분인지, 완전히 깔끔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린 왕자의 부인과 자녀들은 머나먼 캐나다라는 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어린 왕자도 캐나다에 함께 갈 생각이었지만, 그가 사는 별 외에는 밤 12시에 야식을 배달해 주는 곳이 없었기에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기러기 아빠인 셈이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자신을 기러기 아빠가 아닌 'DKNY'로 불러달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독거노인의 약자라고 익살스럽게 답했다. 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졌다. 어린 왕자도 이제는 어엿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이라니...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 평 남짓한 그의 서재는 작업실이자, 하루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여유를 만끽하는 그만의 작은 '장미 살롱'이었다. 그의 아파트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래된 인텔 스피커가 유독 눈에 띄었다. 소리는 여전히 훌륭하게 잘 나온다고 그는 자랑스러워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강 다리 아홉 개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마치 자신의 작은 왕국을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린 왕자의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라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한강이 바라보이는 창가, 그곳에 아담한 와인 바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 와인 가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커다란 와인 셀러가 무려 네 개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도 각 셀러마다 와인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하는 와인 셀러의 개수가 조금씩 달랐다. 누구는 세 개라고 하고, 또 다른 누구는 네 개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끊임없이 와인을 더 사 모으고 있는 듯했다. 이것은 그가 홀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많은 아내들은 남편의 과도한 취미 활동을 쉽게 허락하지 않지만, 캐나다라는 별은 그의 아파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린 왕자의 와인 사랑은 남달랐다. 원래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덕분에 외국어도 빨리 배우고,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불후의 명작 또한 탄생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많은 술 중에서도 유독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어린 왕자는 와인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꼽았다.


어린 왕자는 "와인은 연평균 기온이 10~20도 사이인 70~80개국에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가 생산됩니다. 그 지역마다 나오는 다채로운 와인을 맛보고, 또 그 와인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재미는 끝이 없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마치 어린 왕자가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여러 별들을 탐험하는 즐거움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어린 왕자는 2년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에 교환 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현지 슈퍼마켓의 창고형 리커 스토어에 수백 종의 와인이 탑처럼 쌓여 있는 광경은 어린 왕자에게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었고, 그를 와인의 매력이라는 깊고 푸른 바다 속으로 풍덩 빠뜨려 버렸다.


어린 왕자는 와인 애호가로서의 깊은 애정과 학자로서의 풍부한 지식을 가득 담아 국내 유일무이한 본격 와인 만화인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이라는 작품을 출간했다. 원래 한 권으로 기획되었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결국 두 권으로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열정은 마치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에 쏟는 정성과 같았다.


재미있게 만화를 읽다 보면 와인에 관한 고급 지식과 구체적인 정보가 마치 와인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와인 자체에 대한 접근은 물론, 와인에 얽힌 흥미로운 주변 이야기를 중심으로 쉽고 편안하게 와인에 다가갈 수 있도록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세부적인 요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와인 입문자를 위한 훌륭한 길잡이로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작품을 만드는 어린 왕자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술인 와인조차도 깊이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양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권 <와인의 세계>에서는 와인과 함께 시작된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서부터 와인 제조용으로 재배하는 포도 품종과 특징까지, 와인의 기초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고, 2권 <세계의 와인>에서는 구대륙에서 신대륙까지 국가별 대표 와인 소개에서 기본적인 와인 에티켓까지, 와인을 즐기는 실제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어린 왕자가 와인에 대한 책을 쓰게 된 동기는 그의 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 사람들은 경제 발전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소주와 막걸리를 멀리하고 맥주를 즐겨 마시더니, 이제는 와인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 <신의 물방울>은 드라마틱한 재미를 더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이 만화가 서구 문화에 대한 지나친 숭배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이 만화책이 만화적인 상상력과 감성적인 접근으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게 말이 되느냐"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가진 유럽과 서구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이 그의 별에까지 영향을 미쳐, 와인이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닌 숭배하고 배워야 하는 대상으로 변질된 와인 문화를 꼬집고 싶었다고 한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서 만난 허영심 많은 사람처럼, 와인의 가격과 명성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문화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와인은 비쌀수록 좋은 술이었고, 비싸야만 맛있는 술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했다. 개인의 입맛과 취향은 ‘정석화’된 권위적인 와인 이론 앞에서 철저하게 무장 해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밸류 와인을 찾는 이유는 가격 대비 훌륭한 품질의 와인을 구하기 위해서이지요. 비싼 와인을 사기 위해 그 많은 것을 공부할 필요는 없잖아요.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훌륭한 와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린왕자는 소비 주체로서, 스스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싶었다. 와인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나, 선입견과 거품을 걷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와인을, 그저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매개체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긴 시간 와인을 마시고, 읽고, 쓰고, 그리고 그 속에 이야기를 담아낸 것은 단지 지식을 전하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와인을 통해 다가와 줄 그 ‘오후 네 시’를 기다리며, 조용히 마음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린왕자의 와인은, 그렇게 다가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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