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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ee, 살며 보며 전하다
by 남효진 Mar 07. 2018

피자가 미국에 온 후 일어난 일

디자이너의 미국 라이프스타일 리서치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이사를 준비하며, 나는 그동안 내 주변을 채웠던 다양한 인종들의 얼굴색이 조금 더 다채로워지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거대해진 다문화의 나라에서 만난 간판들은 더욱 복잡해졌고, 교외에는 각 문화 별로 특화된 거대한 슈퍼마켓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우유와 과일을 사려면 동네의 슈퍼마켓, 포기김치와 깻잎을 사려면 한인 마트를 가면 그만이었고, 싱가포르에서 하루 건너 먹던 두리안까지 동남아 마트에서 나쁘지 않은 가격에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다르지만 각자가 자신의 입맛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왼쪽:  애틀랜타에서 동남아 상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시티파머스마켓, 오른쪽: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냉동 두리안 © 남효진)

그런 이 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음식은 아주 많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가장 무난하게 선택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피자이다. 햄버거와 감자튀김 또한 미국을 생각했을 때 으레 떠올리게 되는 음식이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의 메뉴 선택은 단연 피자다. 사실 내게 피자는 이태리에서의 삶을 추억하는 음식이다. 피자를 떠올리면, 한 때 피쩨리아(Pizzeria)에서 사람들과 둘러앉아 각자의 피자와 맥주를 앞에 놓고 늦게까지 떠들던 저녁 모임이 생각나고, 비 오는 날이면 으레 학교 연구실에서 교수님, 선배, 동료와 함께 전화로 주문한 피자를 먹으며 사람마다 제각각인 피자의 취향을 관찰하던 점심시간이 그립다. 피쩨리아 메뉴판에서 늘 만나는 레퍼토리의 피자를 거치며 나 또한 피짜 까프리치오자(Pizza Capricciosa)라는 이태리스러운 발음의 피자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미국에서 만난 피자는 이태리에서 알고 지냈을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을 내게 보여 준다. 마치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를 만나 그가 그 사이 미국 사람이 다되었구나 하는 느낌.


미국의 다문화와 피자


이태리에서 시작된 피자가 미국에서 국민 음식 중 하나가 된 것을 통해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의 2016년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인구의 인종별 구성은 백인 76.9%, 흑인 13.3%, 아메리카 원주민과 알래스카 원주민 1.3%, 아시아계 5.7%, 하와이 원주민과 태평양 섬 원주민 0.2%, 혼혈 2.6%이다. 그러나 이 중 원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이민을 통해 미국에 왔다. 전남대학교 사학과 김봉중 교수의 <오늘의 미국을 만든 미국사>에 따르면, 1870년까지는 이민의 90퍼센트가 영국계 지역, 독일, 스칸디나비아, 캐나다 지역에서 왔으나, 1890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수가 전체 이민자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1920년대부터는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히스패닉계 이민이 증가했다. 그리고 흑인들은 이들보다 앞서 17~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수많은 민족들이 미국으로 짧은 기간에 급격히 이주해왔고 새로 이민오는 사람들의 출신국도 계속 바뀌었다. 이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과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었으나, 정치적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유로 미국에 온 이민자들이 산업화를 만나면서 미국은 각종 문화가 공존하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과 같은 나라가 되었다.

피자가 이태리 출신 이민자들을 통해 미국에 소개된 초반에는 이태리계 이민자들의 거주 지역에서만 판매되었고 주 소비층도 쉽고 값싼 점심을 원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태리에 머물렀던 미군들이 미국으로 돌아가 피자를 찾으면서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피자가 본격적으로 확산화되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피자는 미국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던 음식에서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지역마다 형태와 재료를 달리하며 받아들여졌다(참고).


(왼쪽: 미국 피자의 역사와 변화에 관한 책 , 오른쪽: 미국 내 지역별 피자에 대해 설명하는 웹사이트 이미지)


피자와 개인주의의 만남


미국을 설명하는 또 다른 문화 코드는 개인주의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김형인 겸임교수는 <미국의 정체성 : 10가지 코드로 미국을 말한다>에서 “미국인들이 이해하는 ‘개인주의’라는 것은 나의 주장도 내세우지만 타인의 취향도 존중”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졌고, 자신들의 운명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에는 선택해야 할 것이 많다.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르면서 개개인의 요청사항을 추가할 수 있고, 서브웨이(Subway)나 치포틀레(Chipotle) 같은 음식점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일일이 지정해줘야 음식이 완성된다. 한국의 패스트푸드점이나 보통의 식당에서 메뉴 별로 누구나 똑같은 음식을 받는 것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개인주의가 중요한 미국에서 피자는 그럼에도 여럿이 함께 나누어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피자 전문 저널리스트인 리즈 버렛(Liz Barrett)은 <피자, 한 조각의 미국 역사 (Pizza, A Slice of American History)>라는 책에서, 모든 미국인들은 친구나 가족들과 같이 둘러앉아 나눠먹을 수 있게 잘라진 피자를 한 조각씩 잡고 허겁지겁 먹던 생애 첫 피자에 관한 추억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태리에서 한 사람 당 한판 씩 자기만의 피자를 갖는 것과는 다른 모습의 추억이다. 그래서 피자는 미국에 온 후 사이즈가 더욱 커졌고, 여럿이 함께 먹을 피자를 주문하려면 사람들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피자의 종류와 토핑을 의논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피자에서도 미국의 개인주의를 반영한 피자가 등장했다. 여럿이 나눠먹는 피자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 내가 만드는 피자, 이른바 개인주의와 피자의 결합이다.


개인주의를 만나 선택하는 재미를 더한 피자


2008년에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된 모드피자(MOD Pizza)는 현재 미국 내 160개 이상의 점포를 가진 피자 체인으로,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레스토랑 체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모드피자를 보면 피자헛(Pizza Hut), 파파존스(Papa Johns)와 같은 피자체인점보다 서브웨이, 치포틀레 같은 다른 종류의 패스트푸드점이 떠오른다. 모드(MOD: Made on Demand, 요구에 따라 만든다는 의미)란 이름답게, 가게를 방문한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토핑으로만 채워진 피자를 만들 수 있다. 초고속(Superfast)을 지향하지만 주문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화덕에서 충분히 구워진 피자를 받아 들 수 있다. 이렇게 피자를 주문하고 먹는 과정에서 개인주의가 피자의 경험을 어떻게 바꾸는지 살펴볼 수 있다(동영상).


나만을 위한 자유로운 선택

피자를 주문하는 동안 나와 내 앞의 직원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내 피자에 집중한다. 피자의 가격이 토핑의 종류나 무게와 상관없이 ‘미니, 보통, 메가’라는 피자 반죽 사이즈에 따라 정해져 있어, 원하는 토핑을 원하는 만큼 부담 없이 얹을 수 있다. 어린이 손님도 예외 없이 당당하게 자기 눈높이에서 보이는 토핑을 지목해 자기가 먹고 싶은 피자를 주문한다. 토핑의 종류가 35가지로 다양해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즉흥적인 조합이 가능하다. 채식주의자도 육류 외의 토핑으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 충분히 고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어린이가 자기 피자를 혼자 주문하는 장면 © 남효진)
(Pizza Capricciosa)와 같은 구성에 시금치를 더해 만든 나만의 피자 © 남효진)

복잡한 과정을 단순하고 빠르게 

식사 시간에 피자집을 찾아온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토핑을 고르고 만들어진 피자를 화덕에 굽다 보면 주문에서 먹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피자 주문 과정을 조립 라인화하고 직원들이 토핑을 고르는 고객 앞에 일렬로 서서 피자를 완성해 감으로써, 피자는 빠르게 완성된다. 미국에서 파파존스와 같은 피자체인점에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고 직접 가게에 방문해 피자를 받아오는 경우, 주문 후 최소 15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모드피자에서는 피자의 토핑을 선택하는 데 1~2분, 화덕에서 굽는 데 5~7분 정도면 접시에 담긴 자기 피자를 받아 들 수 있다.

(일렬로 서서 피자를 제작하는 직원들과 주문하는 사람들 © 남효진)
(조립 라인화된 피자 제작 과정 © 남효진)

따로 또 같이 먹는 즐거움

피자가 개인화되면 내가 먹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부담 없는 가격에 피자를 사 먹을 수 있다. 여러 사람을 모아 피자 종류를 타협하고 분량을 나눌 필요가 없게 된다. 파파존스에서 2~3명이 같이 나눠먹을 수 있는 Large 사이즈 피자 한 판이 19.99$인데, 여기에서는 어린이들이나 작은 양을 선호하는 여자 성인들이 선택하는 미니 사이즈가 $5.27이고 대개의 성인 남자 한 명이 선택하는 보통 사이즈가 $8.27이다 (2017년 8월 기준). 자기가 먹고 싶은 크기와 토핑으로 각자 피자를 주문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손해보지 않는 선택이다. 


가게 안에는 혼자 온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와서 피자를 먹는다. 방문객들 중 어린이들을 동반한 가족들도 많고, 어린이들 대부분은 별도의 자기 피자를 직접 주문한다. 피자가 개인화돼도 미국 사람들에게 피자는 여전히 가족, 친구와 함께 즐기기에 좋은 음식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친구, 가족과 함께 각자의 피자를 먹고 있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 남효진)

이태리에서 넘어온 피자를 가장 미국스러운 방식으로 변형시킨 모드피자는 이제 영국에서 매장 수를 늘려가고 있다. 그런데 피자가 미국스러운 상상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피자 체인인 도미노피자Domino’s Pizza는 2016년에 뉴질랜드에서 세계 처음으로 드론을 사용해 피자를 배달했고(링크),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로봇을 사용한 피자 배달을 준비 중이다(링크). AI를 활용해 피자를 목소리만으로 주문하는 시스템도 구축하고 있다(링크). 피자가 미국에서 산업화되면서 미국식 피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이제 첨단기술과 결합하여 피자를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배달하는 과정도 진화 중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피자 한 조각을 먹으며 내 피자를 만들어준 피짜이올로(Pizzaiolo, 피자를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이태리어)뿐만 아니라, AI와 드론과 로봇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피자를 먹을 수 있게 해 준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에게까지 감사해야 할 날들을 곧 만나게 될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피자가 미국에 온 후 일어난 일이다.




‘크로씨(Crossee, http://crossee.co)’는 한국-이태리-싱가포르를 거쳐 미국에 살고 있는 남효진, 한국-영국-스웨덴-에티오피아를 거쳐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차민정, 한국-영국을 거쳐 일본에 살고 있는 박혜연, 한국-핀란드-한국을 거쳐 다시 핀란드에 살고 있는 이방전, 이 네 명의 디자이너가 함께 하는 디자인 리서치 플랫폼입니다. 미국, 싱가포르, 일본, 핀란드에서 현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환경과 그 이면, 당연하게 이용하는 인프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서비스 등에 대해 네 명의 디자이너가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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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남효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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