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디자이너는 미국에 살면서
출산 후 엄마와 아기가 머무르는 MBU(Mom & Baby Unit)는 분만 병실보다 작은 사이즈의 1인실로 양변기와 샤워부스가 있는 작은 화장실이 있는 방이었다. 담당 간호사인 또 다른 J가 와서 자신을 소개했다.
사진. 출산 후 침대에 누운 채로 옮겨져 이틀 밤을 머물렀던 MBU 병실 입구. 퇴원할 때 처음으로 문 밖에서 병실을 봤다.
사진. 엄마와 아기가 머무르는 방으로 의료진들이 상태를 확인하고 상담하고 도와주기 위해 계속 찾아온다.
분만 병실과 달리 MBU는 간호사 1명이 3명의 산모를 담당했다. 병실에 붙어있는 화이트보드에는 교대 시간마다 담당 간호사와 담당 조무사(Patient Care Technician)의 이름이 업데이트되었다. 한국에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교육과 역할이 다름에도 간호사의 수 부족을 이유로 간호조무사를 간호사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이슈가 되어왔는데, 조무사가 이름부터 Nurse Aide가 아니라 Patient Care Technician으로 불리는 것이 합리적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진. 담당 간호사 및 조무사의 이름과 오늘의 목표를 기록한 병실 내 패널
간호사 J가 통증 정도를 묻고 진통제를 가져왔다. 진통 때 경막외마취를 맞기 시작한 이후 통증이 거의 없었고, 경막외마취를 중단한 후에는 내가 느끼는 진통 수준에 따라 계속 약을 투여받아 분만 이후 통증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약을 주사하고 알약을 줄 때마다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한 후, 침대 옆에 놓인 워크스테이션 앞에서 오더를 확인하고 내 환자 팔찌의 바코드를 스캔했다.
사진. 침대 옆에 위치한 워크스테이션. 간호사뿐만 아니라 아이의 청력검사를 안내하러 온 직원도 침대 옆에서 바로 일정을 입력했다.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경우, 자연분만 산모는 1박 2일, 제왕절개 산모는 2박 3일을 머무르는 그 방에서 나는 퇴원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호흡에 문제가 있어 NICU에서 6시간을 머물렀던 아기도 병실로 왔다. 아기 역시 퇴원 전날 카시트를 타도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를 다녀올 때를 제외하고 퇴원 때까지 병실에만 머물렀다.
한국에서는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하고 산후조리원에서 회복하는 일정이 거의 일반적이다.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고 안정을 취한 후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해 2~3주 간 머무르며 좋은 음식을 먹고 마사지도 받으며 휴식하는 틈틈이 아기를 돌보고 교육도 받는다. 모아동실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엄마는 병실, 아기는 신생아실에 머무른다. 출산 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3~4주가 걸리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의 출산 후 입원 일수는 보험사와 병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자연분만 후 2박 3일, 제왕절개 후 4박 5일의 입원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내가 이용한 KP와 Overlake Hospital의 경우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자연분만 후 1박 2일, 제왕절개 후 2박 3일 입원이 원칙이었다. 출산을 준비하며 내가 입원할 수 있는 기간에 대해 안내를 받았을 때, 역시 미국의 의료는 무자비하고 HMO는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 후 하루나 이틀 밤만에 몸도 회복이 안된 산모가 아기와 함께 병원 밖으로 떠밀려 난다는 생각을 하니 불쌍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보니 짧지만 그 어느 곳보다 인정 많고 세심함으로 가득 찬 2박 3일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가족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긴밀히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었다.
출산을 앞두고 한국의 출산 경험기를 여러 개 정독했다. 대부분 예쁜 아기를 무사히 만나 감사함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았지만, 많은 경우 산모들은 아픔을 참도록 요구받았다. 분만 막바지에 신속한 진행을 위해 산모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통을 임의로 중단하기도 하고, 제왕절개 후 “정말 너무너무 아파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하는” 통증을 참아내고, 아기를 보기 위해 고통과 사투를 벌이며 신생아실까지 찾아가고, 자기가 낳은 아기를 제한된 시간만 볼 수 있었다. 고통은 당연한 것이었고 아기를 보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신생아실로 향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모성으로 표현되었다. 병원 밖이라면 부당하다고 항의했을 일들이 병원 안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미국 병원에서 출산과 회복을 위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적어도 일방적이지 않았고 고통을 참으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무리한 움직임을 요구하지 않았다.
MBU에서 지내는 2박 3일 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담당 간호사는 수시로 들러 나와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주고 물품을 채워주고 유축을 도와줬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부축해주고 씻겨주고 패드를 교체하고 돌아와 다시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만들어줬다. 모유수유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Lactation Consultant가 와서 자세를 잡아주고 모유수유 계획안을 만들어줬다. 그럼에도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담당 간호사가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Charge Nurse도 찾아와 마카롱이 담긴 접시와 스파클링 워터를 건네며 축하했다. 마취과 의사가 회복 상태를 확인하러 들렀다. 당직을 맡은 KP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상태를 확인하고 질문에 답했다. 소아과 당직 의사도 아침마다 들러 아기를 검진하고 아기에 대한 걱정에 대해 상담했다. Patient Care Technician은 우리 앞에서 아이를 목욕시키며 목욕 방법을 알려줬다. 이른 아침에는 채혈 담당 직원(Phlebotomist)이 들러 아기의 빌리루빈을 체크하고 선천성 대사이상 검사를 진행했다. 포토그래퍼도 찾아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의 모습을 촬영했다.
밤낮으로 2시간마다 젖을 물리고 유축을 하고 틈틈이 자는 사이 방문을 노크하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마치 단기사관학교에 입소한 느낌이었다. 피곤했지만 퇴원 후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검사와 상담과 교육을 쉬지 않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병원 투어 때 내가 병원 시설에 실망하고 속상해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남편이 어느 순간 말했다, “Quality는 시설이 아니라 서비스에서 나오는 거구나.” 나 역시 동의했다.
사진. 모아동실(Mom & Baby Unit)에 머무르는 만 2일의 시간 동안 방으로 찾아왔던 사람들 중 일부. NICU를 제외하고 아이에게 하는 모든 일이 부모 앞에서 이루어졌다.
유도분만 초반에 당직이었던 Dr. L이 다시 당직이 되어 나의 출산 다음날 반가운 얼굴로 병실로 찾아왔다. “자연분만을 시도하다 결국 제왕절개로 끝났으니 최악의 출산”이라며 아쉬워하는 내게 Dr. L은 다르게 생각하길 권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최선을 다했고 산모도 아기도 건강하니 이것은 성공적인 출산”이라고 했다. Dr. L 덕분에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출산을 ‘최악’이 아니라 ‘최선’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어 고마웠다. 5주 후에 예정된 Dr. L과의 산후 검진(post-partum visit) 때 다시 보기로 하고 인사를 나눴다.
입원 중 식사는 병실에 비치된 메뉴를 보고 원하는 시간에 병실 전화기를 통해 주문했다.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원하는 때 원하는 메뉴를 골라 전화를 하면 잠시 후 방으로 뚜껑이 덮인 그릇들이 배달되어 왔다. 아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식사 주문을 잊고 있을 때에는 간호사가 들러 식사 주문 마감이 얼마 안 남았으니 식사를 먼저 주문하라고 일러주었다. 베이글과 오믈렛과 팬케익이 있는 아침 메뉴에 타이 샐러드, 피자, 스테이크, 맥 앤 치즈, 치즈버거 같은 다양한 점심과 저녁 메뉴, 그리고 아이스크림, 브라우니, 마카롱, 과일 등의 디저트 메뉴까지 매 식사가 풍성했다.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 6시에 미역국으로 통일된 메뉴가 아니라, 정해진 메뉴 안에서 각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음식과 양을 선택하도록 하는 미국식 병원밥이었다.
사진. 병실에서 주문한 식사의 예. 메뉴를 보고 애피타이저와 음료와 디저트를 포함해 원하는 음식들을 골라 원하는 시간에 먹을 수 있도록 주문한다.
퇴원 날의 담당 간호사는 필리핀계로 보이는 N이었다. 오후에 퇴원하기 전에 수술 부위의 스테이플러를 제거해주겠다며 그전에 샤워하기를 권했다. 한국식 마인드로 차가운 음료도 피하고 있던 나는 샤워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샤워를 하고 처치를 하면 더 깨끗하게 관리할 수 있고 집에 가서도 편할 것이라 했다. N의 말대로 용기를 내어 병실 안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오랜만에 다시 정상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쾌했다.
산부인과 당직의사를 마지막으로 만난 후 N이 병실로 찾아와 퇴원 교육을 했다. N은 아기를 안은 채로 출력해 온 퇴원요약지(After Visit Summary)를 보며 설명했다. 그리고 퇴원 교육과 처방약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에 대해 서명을 받았다.
사진. 퇴원 전 담당 간호사가 의료진에게 연락해야 하는 이상 증상, 중요 연락처, 집에서 복용할 처방약 종류와 복용법 등에 대해 담긴 퇴원요약지를 가져와 설명한 후 내 서명을 받았다. 마약성 진통제의 처방전은 직접 받았고 그 외의 처방약은 온라인 처방전(ePrescription)으로 건너편 KP의 약국으로 보내졌다.
출산 후 21일 동안 엄마 건강보험의 커버를 받기에 GirlHyojin Nam이란 이름이 쓰인 발찌를 발목에 달고 있던 아이에게서 발찌를 제거했다. 가방을 챙기고 아기를 카시트에 태우고 병동 보조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병동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