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케어 디자이너는 미국에 살면서
8월의 어느 목요일, 이상하게 눈이 가렵기 시작했다. 눈에 충혈은 보이지 않고 분비물도 없는 상태라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금요일에도 여전히 눈이 가려웠다. 무언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눈이 가려우니 하루 종일 눈에 온 신경이 쓰였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당장 어전트 케어로 달려갈 만큼 긴급한 상태는 아니고 코로나로 대면진료도 가급적 피하는 상황에서 KP WA(Kaiser Permanente Washington, 카이저 퍼머넌트 워싱턴)의 홈페이지에서 매일 24시간 제공되는 채팅 상담 서비스인 케어챗(Care Chat)을 이용할 수 있기에 걱정하지 않고 하루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여전히 눈이 가려웠다. 왼쪽 눈이 조금 빨개지기도 했다. 아침 7시 즈음 노트북을 열고 KP WA 홈페이지에 로그인 해 의료진(Care Provider)과의 채팅 상담을 신청했다. 이전 상담에서는 매번 가정의학과 의사(Family Doctor)가 연결되었는데, 이번에는 Family Nurse Practitioner가 배정되었다. Nurse Practitioner(NP)는 진단과 처방의 권한을 가지는 전문 간호사를 말한다.
화면. KP WA 홈페이지에서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채팅 상담 서비스인 케어챗(Care Chat). 가입한 보험 상품의 혜택으로 포함되어 별도의 비용이 요구되지 않는다. Care Provider와의 채팅 선택 시 의사와의 상담도 가능하다.
NP는 캐어챗에서 진료 상담 전 늘 묻는 질문인 내가 현재 위치한 주(state)를 확인했다. 워싱턴 주 밖에 위치한 상태에서 KP WA와 진료 상담을 하는 경우 특정 의료 문제에 대한 진료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곧이어 상담을 시작했다.
나는 NP에게 3일째 겪고 있는 눈의 가려움증에 대해 설명했다. NP는 증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가려움 외에 눈이 충혈되거나 분비물이 있는지를 물었다. 또 시야에 변화가 있는지, 빛에 대한 민감도가 증가했는지, 눈에 통증이 있는지,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을 때 아픈지를 물었다. 그리고 나에게 눈의 사진을 찍어서 대화 중인 창에 업로드하도록 한 후 내가 사진을 찍어 업로드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화면. 토요일 아침 KP의 캐어챗(Care Chat)을 통한 의료진 상담
NP는 가려움 증상만 느끼고 있는 내게 계절성 알러지를 갖고 있는지 물은 후, 내가 알러지 때문에 가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알러지를 위한 일반의약품들을 추천해줬다. 알약인 클래리틴(Claritin, 성분명 Loratadine)과 함께 나프콘-에이(Naphcon-A) 안약을 쓰는 것이 가려움과 충혈 증상을 가라앉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둘 다 모유수유 중인 상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약인 것도 확인받았다. NP는 1주일 간 약을 사용해보되 알러지 증상이 지속되면 계절이 지나갈 때까지 사용해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증상이 심각해지거나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다시 상담을 신청하도록 했다.
내 문제와 해결책이 복잡하지 않아 상담은 약 20분 만에 끝이 났다. 상담을 마친 후 바로 타겟(Target) 홈페이지로 직행했다. 검색창에서 Claritin을 검색하니 다양한 제형과 분량의 Bayer사 Claritin 브랜드 제품들과 Target의 up&up 브랜드를 단 복제약인 allergy relief 제품들이 보였다. 24시간에 한 개씩 복용하는 제품으로 10개 분량의 제품을 확인하니 클래리틴(Claritin)의 Liqui-Gels 10개 제품 가격이 $12.49, 타겟(Target) up&up의 10개 제품 가격은 $3.29였다. 가격 차이가 심해 복제약을 선택했다.
안약 역시 브랜드 약인 Alcon사 Naphcon-A Eye Drops 0.5oz(15mL)가 $10.59, 같은 성분의 복제약인 Target up&up의 eye allergy relief drops 0.5oz(15mL)가 $3.29였다. 안약 역시 가격 차이 때문에 복제약을 선택했다. 알약과 안약 두 가지를 타겟의 주차장에서 건네받는 드라이브업(Drive Up)으로 주문했다. 2시간 후 여전히 가려운 눈으로 아이에게 수유를 하는 중에 제품이 준비되었다는 타겟의 알람 메시지를 받았다. "고마워요, 타겟"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화면. 항히스타민제인 Loratadine 10mg 10개 들이 제품인 Bayer사 Claritin Liqui-Gels와 복제약 Target up&up allergy relief의 가격 차이
사진. 2019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San Jose)의 코스트코 매장 내 알러지 관련 일반의약품 진열대 사진. 미국의 드럭스토어나 코스트코 모두 일반의약품 판매 시 브랜드 약과 자체 브랜드 약을 같이 진열해 판매한다. 이날 매장에서는 클래리틴 105개 알약을 담은 제품(105 tablets)이 $38.89, 그 위에 성분과 함량이 동일한 복제약을 365개 담은 Costco Kirkland Signature 브랜드의 ALLERCLEAR 제품(365 tablets)이 $3 할인 적용으로 $7.99에 판매 중이었다.
9일 동안 약의 포장에 나온 Drug Facts의 설명대로 하루에 한 번 allergy relief 알약을 먹고 하루 최대 4번 안약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간지러움은 계속됐다. 원인을 모르면서 처음 겪는 알러지 증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기에 괴로웠다. 간지러운 눈을 비비며 아이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알러지로 고생한 적이 없던 내게 알러지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
24시간에 한 번씩 복용하는 알약의 복용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알약을 복용하면 매번 복용 시간을 핸드폰에 입력했다. 내가 복용하는 약은 포장에 allergy relief라는 이름을 달고 성분명은 loratadine인 항히스타민제였는데, 머릿속에서는 정작 클래리틴(Claritin)이라는 이름이 맴돌았다. Claritin은 눈, 코, 부비동이 답답하지 않고 막히지 않고 졸리지 않아 정신적∙육체적으로 맑은 상태인 clarity(명쾌함)라는 단어를 이용해 만든 브랜드명이다. Claritin을 발음할 때 느껴지는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이 allergy relief와 loratadine에서는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클래리틴'을 한글로 표기하면 Clarity와 Clear가 바로 연상되지 않아 작명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다.)
구입한 allergy relief 10개들이 포장의 약을 복용했지만 증세가 크게 나아지지 않아 다시 약을 구입해야 했다. 이번에는 가격의 차이를 무시하고 Claritin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약을 먹을 때마다 내 속에서 아무런 공명이 없는 loratadine 대신 발음할 때마다 입속도 기분도 깨끗해지는 느낌의 Claritin을 나도 한번 써보고 싶었다. 또다시 타겟의 드라이브업으로 약을 구입했다.
Claritin을 복용하고 잔 다음날, 신기하게도 가려움이 거의 사라졌다. 오랜만에 살 것 같았다. 아침에 책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앞에 놓인 약상자들을 바라보다 Claritin의 약 포장에 눈길이 갔다. 그곳에는 약의 이름과 설명뿐만이 아니라 지난 열흘 간 눈을 비비며 산 내게 너무 간절했던 맑고 깨끗한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정체 모를 알러지원이 없는 푸르고 맑은 세상, 그래서 내가 다시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푸른 벌판에 맑은 하늘, 거기에다 명쾌한 느낌을 주는 생생(vivid)한 파란색과 빨간색의 조합까지,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그림이었다. 약상자가 내게 마치 "힘들지?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알러지人의 마음을 아는 이들만이 만들고 결정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신규 알러지人의 마음에 감동이 몰려왔다.
사진. Bayer사 Claritin 알약 30개들이 제품과 Target up&up 10개들이 제품 패키지
화면. Clarity와 Clear를 강조하는 Claritin 광고 영상. Feel the Clarity로 시작해 Live Claritin Clear로 끝난다. 알러지약 광고를 보며 Clarity와 Clear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일반의약품의 포장 하나에 호들갑을 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소비자가 드럭스토어와 마트에서 직접 일반의약품을 선택한다. 브랜드 약 옆에는 늘 CVS, Walgreens, Costco 같은 유통업체들의 자체 브랜드 제품들이 가성비를 내세워 함께 진열되어 있다. 한국처럼 약국에서 약사에게 증상을 말하고 약사가 건네주는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가성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브랜드명과 패키지와 그림과 색상 또한 약을 차별화해 소비자를 설득하는 일에 동참한다.
클래리틴을 먹고 알러지 증상이 잠잠해지면서 복제약의 효능을 의심하게 된 내게 약사인 친구가 설명했다. 브랜드 약과 복제약의 효능 차이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 알러지원이 사라지고 히스타민이 줄어서 나았을 거라고. Loratadine은 강력한 항히스타민제도 아니라고.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는 푸른 풀밭과 맑은 하늘을 보여주며 입속에서 깨끗하게 공명하는 Claritin이 이미 allergy relief와 loratadine을 밀어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