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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Oct 08. 2020

헬스케어라는 멤버십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미국 헬스케어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다. 뱀에 물려 1억, 산부인과에서 7억과 같이 가끔 한국 사이트들에 올라오는 충격적인 미국 의료에 대한 글들을 보다 보면 미국은 이상하고 미국 사람들은 불쌍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 여건이 다르다. 대기업 직원,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노인, 자영업자, 저소득층,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의 와이프가 가입할 수 있는 보험과 지불해야 할 비용과 혜택이 다르고 병원의 문턱도 다르다.


국민건강보험이 공기와 같이 늘 함께 하고 동네와 회사 근처에는 다양한 의원들이 즐비한 환경에서 살아온 내게 다른 나라의 헬스케어는 늘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었다. 특히 미국의 헬스케어는 그 서비스들이 제공되고 이용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기에 헬스케어 디자이너로서 눈여겨보게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미국 헬스케어의 평균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주마다 환경과 규정이 다르고, 같은 미국 안에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신분, 나이, 건강, 재정, 고용 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건강보험이 달라지기에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헬스케어 디자이너로서 미국에서 놓치고 싶지 않아 눈여겨본 포인트들이 있다. 미국에서, 미국이기에, 미국의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벤치마킹,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다.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의 헬스케어를 경험하며 정리해온 노트를 소개한다.


헬스케어라는 멤버십


인생을 바꾸는 멤버십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사는 지역에 따라 풍경, 인종, 물가 등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유무와 종류는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 그 이상의 차이를 가져다주었다.


헬스케어는 생의 필수 서비스이지만, 개인의 여건에 따라 적절한 상품을 선택해 돈을 내고 가입한 후 이용하는 미국의 방식은 신용카드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용카드를 새로 만드는 경우, 신용카드 회사에 대한 경험과 선호도에 따라 회사를 선택하고, 연회비, 라이프스타일, 혜택을 고려해 자신에게 맞는 카드의 종류를 선택한다. 삼성 임직원들만 발급받을 수 있는 SFC 삼성카드처럼 특정 조직의 구성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신용카드도 있다. 좋은 멤버십을 갖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돈을 많이 낼 수 있거나 좋은 직장을 가지면 더 좋은 멤버십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좋은 멤버십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용카드마다 혜택이 다르듯 각 건강보험 회사와 상품마다 제공하는 혜택이 다르다. 또 직장 별로  건강보험에서 제공하는 혜택이 다르기에, 좋은 건강보험은 좋은 인재를 채용하기 위한 혜택이자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국민건강보험이 난임에 대해 지원하는 기준은 혼인관계에 있는 난임부부에서 여성이 만 45세 미만일 때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준은 가지고 있는 건강보험의 약정이다. 미셸 오바마는 자신의 회고록 비커밍(Becoming)에서 자신이 두 딸을 임신하기 위해 모두 건강보험의 커버를 받아 시험관 시술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첫째 딸이 1998년생임을 고려할 때 당시 그녀의 건강보험 혜택이 매우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시험관 시술을 받는 사람들은 시험관 시술이 필요해서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이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멤버십에 따라 난임부부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참고. Michelle Obama's IVF journey could help more women (opinion) (CNN, 2018/11/14)).


좋은 멤버십을 가졌지만 이를 계속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 미국 센서스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조사 인구의 54%가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했다(참고. Health Insurance Coverage in the United States: 2018) 코로나의 유행으로 인한 경기 침체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직업을 잃는 것과 함께 건강보험이 특히 중요한 시기에 보험 또한 잃도록 만들었다. 직장 건강보험을 잃게 되면 COBRA(Consolidated Omnibus Budget Reconciliation Act)라는 제도를 통해 이전 직장에서 이용하던 보험을 계속 유지할 수는 있는 옵션이 있으나, 이전에 내던 직원 부담분의 건강보험료에 고용주가 부담하던 건강보험료까지 모두 직접 부담해야 하므로 상당히 비싸다. 아니면, 퇴직 후 60일 특별 가입 기간(special enrollment period)의 자격을 얻어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운영하는 Health Insurance Marketplace를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 수입이 없어진 상태에서 건강보험에 꼭 가입해야 할지 고민하게 될 수 있다.


사진. The Washington Post의 'First, the coronavirus pandemic took their jobs. Then, it wiped out their health insurance(2020/4/18)' 기사 중에서.

; 소프트웨어 영업직으로 근무하다 3월 말에 해고 통지를 받은 Greg Litvin. 와이프의 직장이 두 자녀의 건강보험을 커버하지만 와이프의 월급도 40% 삭감됨. 최근의 MRI에서 뇌에 병변을 발견해 또 다른 MRI 검사 오더를 받은 상태. 실직으로 건강보험이 4월 30일에 종료되는데, 4월 말 이전에 MRI 검사 예약을 잡고자 애쓰고 있었음. 보험이 있는 상태에서 MRI 검사를 받으면 $391을 copay로 지불하면 되나, 보험 커버 없이 MRI 검사를 받게 되면 $1,400 이상을 지불해야 함.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는 사이 휴학과 유학과 같이 소속이 달라질 때마다 한국의 내 건강보험은 지역가입자나 직장가입자로 물 흐르듯 바뀌었다. 마치 엄마처럼 내가 어디에 속하든 날 잊지 않고 챙겨줬다. 그러나 미국의 건강보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라져 버리는, 친하지 않은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쫓아가 꼭 붙잡지 않는 한 기다렸다는 듯 끝을 냈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였다. 건강보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서비스가 아니라 가입 회원들에게 차별화된 비용과 혜택을 제공하는 멤버십 서비스가 될 때, 같은 나라 안에서 사람들은 헬스케어를 이용하며 서로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멤버십이 없는 사람은 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미국의 Institute of Medicine에서 출간한 Care Without Coverage: Too Little, Too Late(2002)는 건강보험 부재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결과를 연구했다. 건강보험이 없는 노동 가능 연령 인구(working age) 약 3,000만 명을 조사했는데,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질병과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필요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치료를 받아 더 아프거나 더 일찍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사고나 질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이 있어도 이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헬스케어 멤버십이 없다면 치료가 부족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멤버십에 따라 달라지는 경로와 비용


애틀랜타에서 살던 2018년 2월, 내가 가입하고 있던 BCBSGA 건강보험에서 편지가 왔다. 애틀랜타 내 큰 병원 체인인 Piedmont Healthcare와의 계약 연장을 위한 협상이 타결되지 않고 있어, 3월 말까지 계약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4월부터 Piedmont Healthcare가 out-of-network 병원으로 분류된다는 공지였다. 보험사는 계약 협상이 계속되는 동안 환자들에게 아직 계약이 타결되지 않았다는 공지를 계속 업데이트했는데, 이는 환자들을 뒤에 둔 보험사가 병원에게 보내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둘 사이의 계약은 4월 말에 타결되었다.


화면. 2018년 3월, BCBSGA 홈페이지 내 Piedmont Healthcare와의 계약 협상에 대한 공지. 여전히 협상 중이라는 내용이다.


화면. BCBSGA 홈페이지 내 Piedmont Healthcare와의 계약 협상이 타결되었음을 알리는 공지

미국에서 건강보험과 의사 및 병원은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한국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통해 국내의 모든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의 지정 의료기관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어느 의료 기관에서든 원하는 곳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건강보험 회사들은 자신들이 계약을 맺은 의사, 병원, 랩 등으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한 보험 회사 안의 건강보험 상품들이라도 네트워크 구성이 서로 달라질 수 있기에 건강보험 상품을 선택할 때 이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잘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의사들과 병원들은 여러 개의 건강보험 회사와 네트워크 계약을 맺고, 보험사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는 서비스를 할인된 가격에 제공한다. 의사들과 병원들이 모든 보험회사들과 계약을 맺지는 않기 때문에, 클리닉과 병원들은 홈페이지의 소개 정보에서 해당 클리닉과 계약을 맺고 있는 건강보험의 목록이나 계약하지 않고 있는 건강보험의 목록을 보여준다. 건강보험의 홈페이지에서도 가입하고 있는 건강보험 상품의 네트워크에 포함되는 의사들을 검색할 수 있다.


그리고 의사를 만나고 병원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 가지고 있는 멤버십에 따라가야 할 경로와 비용이 달라진다. 추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 가지고 있는 건강보험의 네트워크에 속한 의사를 선택해야 하고, 클리닉과 병원에서는 환자가 가진 건강보험의 네트워크에 속하는 검사 기관으로 검체를 의뢰한다. 검사 기관은 똑같은 검사라도 보험회사에 청구할 때와 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환자에게 전액을 청구할 때 비용을 다르게 계산한다.


“KP라서 행복해요.”


현재 이용 중인 KP는 건강보험 회사이면서 동시에 직접 의료시설을 소유하고 의료진들을 고용하여 서비스를 운영하는 헬스케어 서비스 제공자이기에, 이전에 이용했던 건강보험 회사와는 태도가 상당히 다르다. KP는 보험사라기보다 나를 책임지는 healthcare provider 느낌이다. 이전에 이용하던 BCBSGA(현 Anthem) 보험사나 POS와 HMO라는 건강보험 타입의 차이를 넘어, ‘KP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2020년 3월, 미국에서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KP는 발 빠르게 이메일과 우편으로 자신들의 대응 방향을 알려왔다. 코로나로 심각하게 아픈 환자들이 늘어날 가능성에 대비해 긴급하지 않은 시술과 수술을 연기하고, 거점 의료 센터 외의 시설은 임시로 폐쇄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고, 대면 진료가 필수가 아닌 경우 온라인 진료와 채팅 상담을 이용하며, 긴급히 필요한 처방약들도 주변 대부분의 지역에서 당일 배송을 제공하겠다는 등의 방침에 대해 들었다. 보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나와 가족이 아플 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대면 진료를 못 받아 불안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신속히 변화하고 알려줘서 믿음직스러웠다. 다른 보험사였으면 내가 병원을 이용하면 보험이 어떤 혜택을 줄지를 얘기할 텐데, KP는 보험사이면서 동시에 의료서비스 제공자이기에 보험의 혜택이 아니라 자신들이 나를 코로나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떤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든든했다.


KP는 또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을 하며 쇼핑을 하며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통합을 헬스케어에서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나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던, 나와 아이의 건강 정보를 웹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의료진에게 이메일로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을 받는 일이 가능해지자, 병원을 다니고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이렇게 속 시원하고 재미있던 적이 없었다.


5월의 어느 월요일, 출산 후 4개월 차가 되면서 시작된 머리 가려움증 때문에 아침에 KP의 Care Chat으로 가정의학과 의사의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사진으로 두피 상태를 확인한 후 코코넛 오일이나 티트리 오일 마사지를 먼저 시도해보도록 권했다. Amazon을 검색해  2018명이 구매자가 별 4.5개의 평가를 내린  Amazon’s Choice인 티트리 오일 제품을 주문했다. 오후에는 아이의 기저귀를 바꿔주다 아이의 똥에서 소량의 피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같은 채팅 서비스로 또 다른 가정의학과 의사와 상담을 했다. 의사는 내가 업로드해 둔 사진 3장을 살펴보고 아이의 상태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한 후, 가끔 이런 일이 생기는데 대부분 약간의 자극을 받아 생기는 일로 따로 치료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했다. 상태가 안 좋아지거나 새로운 증상이 생기면 다시 연락하라는 말을 들으며 상담을 마쳤다. 한국에서라면 아이를 둘러업고 동네 의원에 다녀올 시간이었으나, 그러기 힘든 미국에서 1시간 안에 집 안에서 상황이 정리되어 감사했다. 오후 4시경 Alexa가 티트리 오일이 아파트에 도착했음을 알려줬다.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샤워를 한 후 배송받은 티트리 오일로 두피를 마사지했다.


화면. KP의 Care Chat 중 Care Provider와의 상담 화면. 가정의학과 의사나 NP와 연결되어 1:1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대기자가 많을 때는 오프라인 클리닉처럼 직원이 개입해 상담 내용을 확인한 후 순서를 조정하고 상담에 앞서 미리 필요한 내용을 입력해두도록 안내한다.

하루를 마치며 문득 ‘KP라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멤버십의 덕을 톡톡히 본 하루였다. KP가 아닌 다른 보험을 가지고 있었다면 코로나가 유행하는 와중에 아이의 피 섞인 똥기저귀를 보며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마존 프라임이 아니었다면 아침에 의사가 권한 티트리 오일을 몇 시간 안에 배달받아 저녁에 샤워 후 머리를 마사지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가지고 있는 멤버십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구나' 새삼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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