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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Oct 11. 2020

소비자를 위한 남다른 디자인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환자이기 전에 소비자


2007년에 소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식코(Sicko)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미국 헬스케어의 잔인함을 고발했다. 영화에서 소개된 대로,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 병원에서 내쫓기고 두 개의 손가락이 절단됐을 때 지불 가능한 비용에 따라 한 손가락만을 치료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관점을 알아야 한다. 바로 사람들을 환자이기 전에 헬스케어라는 상품의 소비자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안, 많은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받고 내 선택과 의견을 묻는 순간들이 많았다. 단순히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고 환자를 더 존중하는 문화에서 사는 덕택으로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정말 일관되게 많은 정보와 동의서와 질의응답을 경험하며, 내가 받는 대우가 단순히 환자로서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보험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가 아니라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상품이 될 때, 헬스케어 서비스의 이용자 역시 소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미국에서 거주하며 나라가 주는 혜택이 전무한 비자를 가지고 살았다. 그 덕에, 국민으로 보호받는 것과 소비자로서 대우받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또 건강보험을 가지고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안 외국인으로서나 소수 인종으로서 아무런 차별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당당했고 존중받았으며 요구하는 무엇이든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돈을 내고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였기 때문이다.


소비자 대상의 광고


텔레비전의 광고를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보인다.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박사 과정을 하며 이태리에서 살던 시절, 텔레비전에서는 파스타, 과자, 초콜릿, 자동차, 휴대폰 광고가 줄기차게 나왔다. 한국으로 치면 초코파이와 같은 위상을 가진 Pan di Stelle(빤디스뗄레, 옮기자면 별의 케익) 과자의 광고에서는 하늘에 올라가 따온 별이 Pan di Stelle 과자가 됐다. 하늘의 별을 과자로 만드는 이태리 사람들의 정신에 대해 생각했다.


미국의 텔레비전 광고에서는 약과 IT와 보험이 나온다. 미국은 뉴질랜드와 함께 전 세계에서 처방약의 소비자 대상 직접 광고(Direct-to-consumer prescription drug advertising)가 허용된 2개 국가 중 하나이다. 저녁 시간마다 시청하는 TV의 뉴스 사이사이에는 약 광고가 쉴 새 없이 나온다. 일반 잡지를 펼쳐도 전문 의약품 광고들이 페이지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있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 골다공증, 기억력 저하 등 이름 만으로도 무겁게 느껴지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감을 되찾고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는 광고를 보면 그 질병이 없는 나조차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삶에 대해 희망을 갖고 싶어 진다. 광고 마지막에 으레 나오는 “Ask your doctor if it’s right for you(이것이 당신에게 맞는 것인지 의사에게 물어보세요)”라는 말을 듣다 보면, 나도 어서 의사에게 가서 새로운 가능성을 의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화면. 평일 저녁 6시 30분-7시에 방송되는 CBS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Evening News with Norah O'Donnell 방송 중의 중간 광고를 보면, 2020년 10월 9일의 경우 15개 광고 중 7개가 헬스케어 광고(붉은색 표시)였다. 위에서부터 좌우 순서 대로, 기억력 강화제 Prevagen, 대장암 검사 cologuard, 백신 접종 홍보 BroughtByVaccines.com (gsk), 아토피 피부염 치료제 Dupixent, Medicare 사기 주의 홍보, Salonpas, 심부정맥 혈전증(DVT) 및 폐 색전증(PE) 치료와 재발 예방을 위한 항응고제인 Eliquis 광고의 대표 화면이다.

사진. 미국의 연예 주간지인 People 지 2019년 4월 8일 발행본의 36~38페이지에 실린 Merck사의 면역항암제 Keytruda 광고. 방송 연예 기사 사이에 면역 항암제의 광고가 3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나와 있다.

1997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의 의료 마케팅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이 기간 중 지출 면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한 분야는 소비자 대상 광고 분야로 1997년 21억 달러에서 2016년 96억 달러로 증가했다. 그중 처방약의 소비자 대상 광고는 1997년 79,000개(13억 달러)에서 2016년 460만 개(60억 달러)로 증가했다. 병원과 헬스케어 시스템에 대한 광고도 912,000개(542만 달러)에서 1,760만 개(28억 9천만 달러)로 증가했다.


표. 1997년~2016년의 미국의 의료 마케팅 지출 변화

(출처. Schwartz, Lisa M., and Steven Woloshin. “Medical Marketing in the United States, 1997-2016.” Jama, vol. 321, no. 1, Jan. 2019, p. 80., doi:10.1001/jama.2018.19320.)

FDA는 처방약의 소비자 대상 광고가 약의 중요한 위험에 대해 말로 짧게 설명하면서 완전한 정보에 대해 다른 자료를 참고하도록 안내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TV에서 방송되는 세련된 약 광고 화면은 부작용에 대한 속사포 같은 설명과 결합되어 기이한 조화를 이룬다. 연구의 분석에 따르면, 소비자 대상 광고들은 약의 효과를 수치가 아니라 추천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고 긴 목록의 부작용들을 긍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보여줌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쇄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광고들은 치료 효과나 결과에 대한 데이터 없이 편의, 명성과 희망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방약과 의료 서비스에 대한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옵션들에 대한 정보를 줄 수는 있으나, 소비자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쳐 불필요한 소비를 하거나 더 높은 비용을 지출하도록 만들 수 있어 우려된다.       


미국 헬스케어의 현실에 대해 분석한 An American Sickness의 저자이면서 의사이자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스 로젠탈(Elisabeth Rosenthal)은 광고에 끌려 의사에게 연락하기 전에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광고 제품들의 가치와 비용을 검색해보라고 말했다. 처방약의 경우, 약국 브랜드 별로 약의 판매 가격을 알려주고 할인 쿠폰을 제공해주는 GoodRx.com에서 가격을 먼저 확인하기를 권했다. 또 노인과 장애인 대상의 연방정부 건강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는 불필요한 치료에 지불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메디케어를 운영하는 연방 기관인 CMS(Centers for Medicare and Medicaid Services)의 웹사이트에서 메디케어가 그 약이나 기기를 커버하는지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종합해 보면, 세련된 화면과 희망적인 메시지로 포장된 약과 헬스케어 서비스 광고를 매일 만나는 미국의 소비자들에게 분별력은 필수 덕목인 듯하다.


소비자를 위한 남다른 디자인


미국에서 처방약을 구입할 때는 약국에 따라 가격과 포장에 차이가 있다. 일반의약품도 브랜드 약과 복제약이라는 옵션이 있다. 영양제 구입의 가장 큰 쇼핑몰인 아마존에서 영양제 성분을 검색하면 대개 몇 페이지에 걸쳐 수많은 제품들이 보인다. 반창고를 사려고 해도 브랜드와 모양과 개수와 가격을 두고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 선택의 주도권이 소비자에게 있기 때문에, 외관과 사용 방법 또한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진화한다. 그래서 정확함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차갑고 투박한 디자인과 함께 친절하고 감성적인 디자인이 등장하고, 때론 디자인을 통해 편견과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갖고 싶은 제품으로 거듭난다.


일반의약품은 올바른 선택과 사용을 도울 수 있게


일반의약품은 소비자가 전문적인 지식 없이 선택하고 구입해 사용함으로써 심각하지 않은 질병을 스스로 관리하기 위한 제품들이다. 한국에서는 약국에서 일반의약품 구매 시 약사에게 문의하여 약사가 선택해주는 제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고, 약사의 재량에 따라 약국 내 카운터 밖 매대에 제품을 비치해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여 구입할 수 있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또 24시간 연중무휴인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안전상비의약품의 경우, 같은 제품은 1회에 1개만 구입할 수 있고 별도의 복약지도 없이 소비자가 설명서를 참고하여 사용하게 된다.


미국의 드럭스토어나 슈퍼마켓 내의 약국 근처 판매대에는 누구나 마음대로 살펴보고 고를 수 있도록 일반의약품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다. 일반의약품의 포장은 소비자가 약을 선택할 때 정확한 성분명과 적응증을 확인하고 선택하도록 브랜드 약과 복제약 모두 성분명과 적응증을 두드러지게 표시한다. 약국 내에 약사가 근무하는 시간 중에는 약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지만, 진열대에 있는 일반의약품들과 의료용품들은 소비자 마음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계산도 약사를 거치지 않고 일반 계산대에서 진행할 수 있다. Target 내 CVS Pharmacy 앞 진열대에서 일반의약품을 선택해 약사에게 계산을 요청했을 때 업무가 바쁘다며 일반 계산대에 가서 계산하도록 요구받은 적도 있다. 오프라인 약국뿐만 아니라 Amazon, CVS와 같은 쇼핑 사이트에서도 다른 상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반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다.


소비자가 일반의약품을 약사의 복약지도 없이 직접 선택해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일반의약품들의 포장은 그 자체가 정보이자 광고가 된다. 드럭스토어인 CVS나 Walgreens 내의 일반의약품 진열대에는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녹색 등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한 색의 포장에 커다란 글자로 약의 이름과 적응증과 성분명을 보여주는 브랜드 약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약 이름 대신 적응증과 성분명을 내세운 복제약들이 동일 성분과 용량에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며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을 촉구한다. CVS, Walgreens, Costco의 일반의약품 코너는 모두 브랜드 약 옆에 CVS Health, Walgreens, Kirkland Signature라는 자체 브랜드 복제약을 나란히 진열한다. 그래서 일반의약품의 판매대는 온갖 할인과 가성비로 경쟁하는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사진. 드럭스토어 내 브랜드 약과 자체 브랜드 약의 가성비 비교 진열 예. 동일 성분과 용량의 제품을 대놓고 비교한다. 제조사는 유통채널인 CVS, Walgreens, Costco가 자사 제품과 복제 제품을 나란히 진열해두고 복제 제품을 홍보하는 것을 두고 봐야 하는 상황이다. 사진에 보이는 해열진통제 Aleve 옆에는 동일 성분과 용량을 가진 CVS Health의 복제약이 3불 저렴한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다(2019년 2월 샌프란시스코 CVS).

소비자가 직접 약을 선택해 구매해야 하므로, 약 진열 시 올바른 약 선택을 위한 가이드를 함께 제공하기도 한다. CVS 매장은 두통의 종류에 따라 약을 구분해서 담아둔다. 일종의 복약 지도인 셈이다. 두통약 코너에서 서성거리던 소비자가 진열대만을 보고도 자신의 증상에 따라 제품을 선택할 수 있다.


사진. CVS의 두통약 진열 방식. 두통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약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공한다. (2019년 2월 샌프란시스코 CVS)

대용량 판매를 하는 코스트코의 일반의약품 진열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코스트코에서 판매되는 일반의약품의 포장 박스들은 개별 제품을 담는 보호 기능에 더해 박스 자체로도 광고 효과를 노린다. 그래서 날씨가 추워지면 국민 감기약인 DayQuil과 NyQuil이 박스 채로 “감기와 독감에 대비하세요”라는 당부 메시지와 함께 코너 전면에 등장한다.


사진. Costco 내 일반의약품 코너에 진열된 DayQuil과 NyQuil (2019년 2월 산호세 Costco)

영양제는 감성적인 디자인과 즐거운 경험을 제공


출산 전 모유수유를 계획하며 선플라워 레시틴(Sunflower Lecithin)을 구입했다. 미국에서 모유 수유를 하다 유관이 막혀 젖몸살로 고생한 엄마들이 Lactation consultant로부터 선플라워 레시틴 복용을 추천받았다는 글들을 보며 망설일 수가 없었다. 한밤 중이나 주말에 젖몸살이 생겼는데 병원에 가지 못하고 너무 아파 고통스러웠다는 경험을 나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이용한 제품이라며 업로드한 링크를 따라 아마존에서 큰 고민 없이 Now 사의 Sunflower Lecithin 200알을 $9.49에 주문했다. 약병 아니면 화학제품 용기에 어울릴 듯한 하얀색 둥근 병에 재미없는 폰트로 Sunflower Lecithin, 1200mg, Nervous System Support, 200 Softgels라고 새겨진 제품이 도착했다. 아이를 낳고 퇴원해 모유수유를 하며 아침마다 재미없는 하얀색 병에서 커다란 검은색 소프트젤을 두 개씩 꺼내 꿀떡꿀떡 삼켰다.


첫 번째로 구입해 복용하던 Sunflower Lecithin이 바닥을 보일 무렵, 다시 아마존에서 Sunflower Lecithin을 검색했다. 그리고 Sunflower Lecithin으로 검색된 수많은 제품 중 하나에 순식간에 꽂혀버렸다. 이 제품의 이름도 역시 Sunflower Lecithin. 그러나 그 외의 것은 다른 제품들과 모두 달랐다. 구태의연한 디자인의 약병들 사이에서 신비한 코발트블루색 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LEGENDAIRY Milk('전설적인'이라는 뜻의 legendary와 우유가공소나 젖소를 뜻하는 'dairy'의 합성어)라는 브랜드 로고의 M자에서 흘러내리는 젖 한 방울에 이미 ‘와우’를 외친 나는 병의 중앙에 그려진 여자가 찌릿한 가슴을 부여잡고 “유관(DUCT), 유관(DUCT), 풀어줘(LOOSE)!”라고 외치는 일러스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화면. Amazon의 Sunflower Lecithin 검색 화면 (2020/6/22)

사진. Legendairy Milk 브랜드의 Sunflower Lecithin 제품 외관

가격은 이전에 복용하던 Now의 제품보다 $10이 비싼 $19.99였다. Sunflower Lecithin 앞에 Organic이 붙긴 했다. 그러나 나는 Organic이 아니라 패키지에 감동받았다. 제품을 살펴보다 홀린 것처럼 주문을 할 때 가격은 안중에도 없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젖을 짜서 사람을 키우는 내가 조그마한 호사를 좀 누려보겠다는데 누가 막겠는가. 아침마다 신비한 코발트블루색 병에서 투명한 보석 같은 호박색 소프트젤을 꺼내 먹으며 즐거웠다. 의사 만나기 힘든 미국에서 젖몸살에 걸릴까 무서워하는 나에게 마치 ‘너 마음 내가 안다’는 느낌의 회사 이름과 패키지 디자인이 주는 위로와 위트에 대한 대가가 $10인 셈이었다.

 

Legendairy Milk는 모유 수유하는 엄마들을 위한 유기농 영양제 회사이다. 모유 수유를 하며 자신에게 맞는 영양제를 찾느라 고생했던 한 엄마가 여러 문화권에서 모유 수유를 돕기 위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다양한 허브들을 원료로 모유량을 증가시키고 모유 영양을 강화하며 유관 막힘을 예방하는 영양제들을 개발했다. 제품의 이름들은 Liquid Gold, Pump Princess, Milkapalooza(palooza는 대단한 파티를 의미), Cash Cow처럼 감각적이고, 패키지에 담긴 일러스트와 메시지는 유쾌하다. 모유 수유가 고생스럽고 아프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은 엄마들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한편, 복용 중이던 유산균 제품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 올리(Olly)를 발견했다. 그동안 Garden of Life Dr. Formulated PROBIOTICS라는 이름에 Once Daily Prenatal 20 BILLION GUARANTEED 16 PROBIOTIC STRAINS이라는 설명이 붙여진 유산균을 먹고 있었다. 아침마다 첨단 과학의 산물 같은 느낌의 약병에서 아이보리색 가루가 담긴 캡슐을 꺼내먹을 때면 뭔가 과학적 행위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Olly는 달랐다.


사진. Garden of Life의 Prenatal Probiotics와 Olly의 Probiotic+Prebiotic 제품

Olly의 Probiotic+Prebiotic은 유산균과 식이섬유가 복숭아 맛 젤리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오렌지색 띠가 둘러진 투명한 사각통 위의 하얀색 뚜껑을 열자 복숭아 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설탕 같은 가루가 묻은 분홍색 젤리의 맛은 정말 복숭아 맛 젤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건강이 심각한 주제인 연령대에게는 가벼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파서가 아니라 좋은 습관으로 영양제를 먹어보려는 젊은 사람이라면 굳이 약 같은 영양제를 먹을 먹고 싶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젤리를 같이 나눠먹은 남편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한마디로 “맛있네”라고 대답했다. 이른바 ‘맛은 없지만 건강해질 것 같은 맛’ 같은 건 여기에 없었다. Garden of Life의 Pretatal Probiotics 통에는 Take 1 capsule daily(하루에 캡슐 하나씩 복용하세요).라고 나와있는데 Olly의 Probiotic+Prebiotic 통에는 Take 1 gummy daily. Chew thoroughly before swallowing(하루에 젤리 하나씩 복용하세요. 삼키기 전에 완전히 씹으세요.).라고 나와있었다. 패키지도 설명도 맛도 어렵지 않고 무섭지 않았다. 영양제 먹는 일을 쉽고 재미있게 만들려는 노력이 제품의 이름과 패키지뿐만 아니라 맛에서도 느껴졌다.


올리는 예쁘게 디자인한 친환경 가정용품 및 퍼스널 케어 용품인 Method를 창업한 사업가인 Eric Ryan이 두 번째로 창업한 브랜드이다. 2014년에 론칭한 Olly는 밀레니얼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영양제이다. Olly는 점차 건강과 영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밀레니얼 세대(일반적으로 1981~1996년생을 이름)가 영양제를 라이프스타일 제품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많은 영양제들이 제품의 성분을 강조하는 데 반해 Olly는 잠 (Sleep), 젊은 피부(Yoothful skin), 스트레스 관리(Goodbye Stress), 머리카락(Hair)와 같은 혜택을 강조한다. 또 밀레니얼 세대들이 영양제 복용을 잘 기억하고 즐겁게 복용할 수 있도록 제품을 알약 대신 맛있는 젤리 형태로 만들었다. 영양제의 종류도 밀레니얼 세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종류들이다. 런칭 첫해에 손익분기점을 달성하고 2017년에 약 8천만 달러의 판매를 기록한 올리는 2019년 Unilever에 인수됐다.


사진. Olly 비타민 제품 예. Olly는 디자인 스튜디오 Havoc과 협업했다.

사진. CVS의 비타민 및 영양제 진열대 모습. 슈퍼마켓과 드럭스토어의 일반적인 진열 방식이다. 기능 별로 참고할 수 있는 성분에 대한 가이드가 제공돼도 어느 제품을 어느 용량까지 복용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2019년 2월 산호세 CVS)

부끄러운 질환은 편견을 없애고 매력을 추가


로만(roman)은 발기부전(Erectile Dysfunction)과 같은 Sexual Health, 탈모(Hair Loss)와 같은 모발과 피부의 문제처럼 대면 진료를 받기에 다소 부끄러운 질환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진료와 처방약 배송을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비슷한 서비스로 힘스(Hims)와 헐스(Hers), 탈모에만 집중하는 킵스(Keeps) 등이 있다. 증상과 medical history에 대해 설문에 답을 한 후 의사의 확인을 거쳐 처방을 받을 수 있고, 거주하는 주(state)의 규정에 따라 환자가 전화나 화상 진료가 필수인 주인 경우 의사와 전화나 화상으로 상담을 한 후 처방을 받는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환자들이 의사를 직접 만나 상담을 하고 처방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처방전을 가지고 약국을 직접 방문하는 것도 내키지 않을 수 있음을 고려해 처방에서 처방약 배송까지 집을 떠나지 않고 해결할 수 있게 해 준다. roman은 비슷한 서비스들 중 약을 제공하는 패키징 방식 때문에 한번 더 눈이 간다.


화면. Roman 광고 영상 "Treat it anywhere" roman의 광고는 이 분야의 소비자의 애로사항과 그에 따른 roman의 해결책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Uploaded on 2020/1/22)

roman은 은밀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는 약을 평범하면서도 세련된 포장에 담아 매력적인 소지품으로 탈바꿈시킨다. 유튜브에서 roman ED packaging의 언박싱 무비도 찾아볼 수 있다. roman의 빨간색 로고가 박힌 세련된 검은색 약봉지들이 역시 roman의 빨간색 로고가 박힌 검은색 파우치에 담겨 배송된다. 발기부전Erectile Dysfuction이 아니라 ED라는 쿨한 약어(이 또한 의료 마케팅의 전략이다), 그리고 세련된 포장까지 더하면 roman의 약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핫템이 될 수 있다.


사진. roman의 패키지 디자인. roman의 패키지는 뉴욕 시티 기반의 Leadoff Studio에서 디자인했다.

(참고. https://www.leadoffstudio.com/ro-pouch, https://www.leadoffstudio.com/roman)

의료용품은 갖고 싶은 소품으로


Method와 Olly를 창업한 Eric Ryan은 2019년 구급용품을 라이프스타일 악세서리로 디자인한 웰리(Welly)를 런칭했다. Welly는 위급, 상처, 출혈, 처치, 응급조치, 임상과 같은 단어로 설명되는 구급용품을 ‘시도하는 사람들(give-it-a-tryers)’을 칭찬하는 트로피로 프레이밍 하고, 반창고를 용기를 칭찬하는 배지(Bravery Badge)로 재탄생시켰다. 아이들을 위한 유니콘과 몬스터가 그려진 반창고뿐만 아니라 멋을 아는 어른들을 위한 세련된 패턴과 대담한 색상의 반창고를 가방에 하나쯤 넣어두고 집에 몇 개쯤 쌓아두고 싶은 예쁜 깡통에 담았다.


사진. Welly 제품 중 아이들용 반창고 세트 예

2019년 4월에 런칭한 웰리는 부활절 선물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동안 만약을 대비해 구입하라고 권해지던 필요 제품이 사람들이 꼭 가지고 싶을 법한 소품으로 바뀌어 장바구니에 담겼다. 나 역시 웰리를 발견하고 끌리듯 장바구니에 제품을 담은 사람이다. 늘 가방에 비상약과 반창고와 상처 연고와 입술 물집 연고를 넣은 주머니를 넣고 다니는 내가 웰리의 유혹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나를 위해 구입한 반창고는 패턴이 담긴 남색, 짙은 빨간색, 하늘색의 반창고였다.


사실, 웰리 구입 이후 팔에 상처가 생겨 매일 반창고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보니, 반창고는 믿을 만한 제품으로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교체 가능한지 여부가 더 중요했다. 존슨앤존슨의 살구색 Band-Aid와 웰리는 지향점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능은 같아도 둘 다 가지고 싶은, 그래서 두 제품은 시장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마치, 인생에는 심각하고 진지한 친구와 유쾌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친구 모두 필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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