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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Oct 28. 2020

미국 헬스케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

헬스케어 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헬스케어 분야에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대하는 방식에는 나라와 문화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짧은 시간 진행되는 똑같은 검사 과정이라도 검사자와 수진자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대화의 내용이 다르다.


유방암 검진에 이용되는 맘모그램(Mammogram, 유방 X-ray) 검사에 대해 서울, 영국의 에든버러, 그리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리서치를 진행했었다. 맘모그램은 방사선사가 상반신을 탈의한 수진자의 뒤에 서서 가슴을 직접 만져 검사에 적합한 가슴의 모양과 자세를 잡아준다. 또 X-ray 촬영 중 가슴을 판으로 압박하기 때문에 아프다. 검사를 진행하는 방사선사와 검사를 받는 수진자 모두 대개 여자지만, 편치 않다.


한국의 검사실들에서는 방사선사와 수진자가 가능한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대화도 많지 않았다. 불편한 검사를 정확하고 빠르게 끝내는 데 최대한 집중했다. 반면, 에든버러와 바르셀로나의 검사실 안의 관계는 좀 더 친밀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바다 앞에 있는 병원의 검사실에서 만난 검사자와 수진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개인사에 대한 얘기까지 나누었다. 마치 이태리에서 트람을 타면 처음 보는 사람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는 이태리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헬스케어 서비스의 이용자이자 소비자로 살며 때때로 낯설고 새로워서 멈춰 섰던 순간들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보고, 진료를 받고, 입원을 하고, 예방접종에 대한 우편을 받고, 병원의 이메일을 받는 평범한 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경험들과는 달랐다. 미국의 방식을 만난 순간이었다.


치료뿐만 아니라 격려까지 챙기는 광고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틀어 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에 진한 감동을 자주 받는다. 대부분 약 광고다. 미국은 처방약의 소비자 대상 직접 광고(Direct-to-consumer prescription drug advertising)를 허용한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헬스케어 지출이 가장 높은 나라다. 2018년 미국의 헬스케어 관련 지출액은 총 $3.6조로, 이는 GDP의 17.7%에 해당한다(참고. CMS NHE Fact Sheet). 이 큰 시장을 점유하고 확대하기 위해 헬스케어 관련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펼치는 마케팅은 헬스케어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건강을 위한 사람들의 행동과 선택이 바뀔 수 있고 이로 인해 불필요한 헬스케어 지출이 늘어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참고. Medical Marketing in the United States, 1997-2016).


헬스케어 분야에서 일반인이라 불리는 환자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환자가 아니라 돈과 소비결정권을 가진 소비자로 인식할 때, 세상은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고 친절해진다. 성분과 효능과 부작용을 강조한 전문가 대상의 정보를 말하던 약의 광고가 오늘의 삶과 내일의 기대와 그 사이의 행복에 대해 말한다. 단어의 선택을 달리하고, 장애와 질환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에 앞장선다.


2020년 2월 ABC 채널에서 방송된 오스카 시상식의 중간 광고 시간, 모바일 숏폼 동영상 플랫폼인 퀴비(Quibi)와 디스커버(Discover) 카드 광고 사이에 길리아드(Gilead) 사의 HIV 치료제인 빅타비(Biktarvy)의 광고가 나왔다. 일상적인 제품들 사이에 심각한 질병의 약에 대한 광고들을 보여주는 미국의 텔레비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HIV 치료제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는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로 불리며, HIV 감염인은 체내에 HIV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 중 면역체계 손상이 심해져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상태가 에이즈(AIDS)이다. HIV에 감염이 돼도 일찍 발견해 매일 치료제를 제대로 복용하면 안정적으로 질환을 관리하며 정상인과 같은 수명과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 (참고. '빅타비' 자신 있는 이유 "그간 길리어드가 개발했던 HIV약 중 가장 좋은 버전 종합" (메디게이트뉴스, 2020/4/6))


화면. 길리아드(Gilead) 사의 HIV 치료제인 빅타비(Biktarvy) 광고 "Keep Being You"

https://www.youtube.com/watch?v=31sXmuap5RA&ab_channel=GeorgiaMalone

(오스카 시상식 날 TV에서 방영된 광고와 똑같지는 않으나, 메시지와 스타일은 아래 영상과 동일하다.)

광고에 흐르는 나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HIV를 갖고 사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계속 당신 자신으로 살고,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의사에게 빅타비에 대해 물어보세요.
빅타비는 하루 한 알로 특정 성인의 HIV에 사용할 수 있는 치료제입니다. 완치는 아니지만, 작은 빅타비 알약 하나가 세 가지 다른 약들을 가지고 HIV가 검출되지 않도록 싸웁니다. 바이러스의 양을 매우 낮게 유지해 검사에서 측정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노력하고, 계속 창조하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계속 영혼을 쏟아부으세요. (부작용 설명)
만약 당신이 HIV 양성이라면, 당신의 속 모습과 겉모습 모두를 계속해서 사랑하세요.
의사에게 빅타비가 당신에게 적합한지 문의하세요.
What would I say to somebody living with HIV?
Keep being you, Keep loving, keep inspiring, keep striving, and ask your doctor about Biktarvy.
Biktarvy is a complete one pill once a day treatment used for HIV in certain adults. It's not a cure but the one small pill Biktarvy fights HIV with 3 different medicines to help you get undetectable. That means the amount of virus is so low that it can't be measured in a lab test.
So keep pushing, Keep creating, And keep pouring your soul into everything you do. ...
If you are HIV positive, keep loving who you are - inside and out.
Ask your doctor if Biktarvy is right for you.


HIV를 가지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속 좋아하는 것을 하라고 격려하는 광고를 보며 광고의 타겟이 아닌 나에게도 은근한 감동이 몰려왔다. 길리아드 사는 잠재적인 고객들이 광고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HIV와 빅타비에 대해 더 알아보도록 동기부여가 되기를 기대했다. (참고. Gilead's first big TV push for triple combo Biktarvy showcases HIV diversity (Fierce Pharma, 2019/4/17)) 처방약의 소비자 대상 직접 광고가 허락되는 나라의 제약사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이 있는 질환의 치료뿐만 아니라 삶을 향한 응원까지 잊지 않았다.


정보를 공유하고 책임감을 기대하는 병원


현재 이용 중인 KP(Kaiser Permanente, 카이저 퍼머넌트) 메디컬 센터의 진료실에는 EHR(Electronic Health Record, 전자건강기록)에 연결된 컴퓨터가 한 대씩 놓여 있다. 그리고 컴퓨터의 화면은 진료실 안의 모든 이가 볼 있도록 방의 중심을 향해 있다. 컴퓨터의 화면이 가려져있지 않은 덕에 환자와 보호자 역시 EHR을 함께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사진. EHR을 사용하는 공용 컴퓨터의 화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배치한 KP 메디컬 센터 내 진료실

KP에서 진행되는 평범한 진료의 프로세스는 그동안 경험한 다른 클리닉들의 진료 프로세스와 뭔가 조금씩 달랐다. 먼저, 환자가 대기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PA(Physician Assistant)나 간호사가 환자를 마중 나와 개별 진료실로 안내했다. 환자를 소파에 앉힌 후 PA나 간호사는 바이탈 사인을 측정하고 복용 중인 약과 상담을 원하는 주제 등을 미리 확인해 EHR에 입력했다. PA나 간호사가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방을 나가면 곧 의사가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사는 대개 나의 이슈나 질문에 대해 먼저 답을 한 후 필요한 검사를 진행했다. EHR 확인이 필요하면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상담이 마무리되면, 의사는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상담했던 내용들을 요약해 입력했다. 그리고 내가 짐을 챙기는 사이, 의사나 PA 또는 간호사가 오늘의 '진료후 요약지'(After Visit Summary, AVS)를 가져다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진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늘 내 이슈와 질문 리스트를 만들고 상담한 내용을 메모해오던 내게 의료진들이 알아서 요약해 손에 쥐어주는 '진료후 요약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진료를 받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챙겨주는 '진료후 요약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사진. 진료 중 필요시 EHR 화면을 함께 보며 설명을 듣는다.

사진. 아이의 6개월 영유아 정기검진 후 받은 '진료후 요약지'. 사두증 평가를 위한 외부 병원 의뢰 내역, 성장 상태, 당일 예방접종 내역, 이유식 참고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내용은 자동으로 생성되고, 마지막 장의 몇 줄이 진료실 내에서 의사가 상담 후 추가한 부분이다. 내용 입력 시 의사는 단축키를 이용해 템플릿으로 만들어진 문장을 빠르게 삽입했다.

'진료후 요약지'는 미국에서 EHR 확산을 위해 추진한 HITECH(Health Information Technology for Economic and Clinical Health) Act 법안과 관련이 있다. HITECH Act는 금융 위기(Great Recession, 2007년 12월~2009년 6월)에 대응해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한 경기부양책인 American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 of 2009 (ARRA)의 일환이다. 케어의 질과 효율성을 높이고자 EHR 이용을 확산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참고. HITECH Act Resulted in Significant Gains in EHR Adoption in Hospitals (AJMC, 2017/8/15, Accessed on 2020/6/15))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운영하는 정부 기관인 CMS(Centers for Medicare & Medicaid Services)는 HITECH Act의 일환으로 의료진들과 병원들이 EHR을 의미 있게 사용함을 보여줌으로써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Meaningful Use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 인센티브를 받으려면, 병원들이 단순히 EHR을 적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환자 케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여러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EHR를 '의미 있게 이용(meaningfully using)'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3단계로 진행된 Meaningful Use 프로그램은 '진료후 요약지'를 1단계(2011-2012)의 요소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참고. Providing Clinical Summaries to Patients after Each Office Visit: A Technical Guide (Accessed on 2020/6/15))


'진료후 요약지'에는 3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환자가 진료받은 내용을 기억하고 필요시 가족에게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둘째, 환자가 건강 행동과 만성질환 관리에 있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셋째, 환자와 그 가족이 자신들의 정보를 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잘못된 자료를 찾고 수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EHR 정보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환자에게 진료 후 매번 '진료후 요약지'를 제공하는 것은 기존의 워크플로우를 상당히 바꿔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Meaningful Use의 요구사항들 중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환자들에게 매번 '진료후 요약지'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지려면, 첫째, 환자가 방문한 시간 동안 요약지를 위한 모든 정보가 EHR에 입력되어야 하고, 둘째, 환자가 클리닉을 떠나기 전에 '진료후 요약지'를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져야 한다. (참고. Providing Clinical Summaries to Patients after Each Office Visit: A Technical Guide (Accessed on 2020/6/15))


이 두 가지를 KP가 해내고 있었다. 다른 클리닉들과 조금씩 달랐던 KP의 진료 순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워크플로우였다. 임신 중 진료와 아이의 영유아 검진 때마다 받아와 요긴하게 참고하고 있는 '진료후 요약지'가 모든 의료진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서비스임을 알았을 때 미국의 헬스케어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KP는 회원들이 자신의 건강에 적극적으로 책임지기를 기대한다. (참고. What health systems can learn from Kaiser Permanente: An interview with Hal Wolf (McKinsey & Company Health International, 2009/7/1)) 이를 위해 회원들과 의료진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2005년부터 담당 의사에게 이메일로 상담을 하고 회원들이 환자 포탈에서 자신의 건강 정보를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해왔다. KP는 2020년 9월의 기사에서 코로나 유행 후 모든 진료의 80%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참고. Today’s unprecedented crisis inspired health care innovations with long-lasting benefits (Portland Business Journal, 2020/9/1)) 이는 단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서가 아니라, 회원들이 웹사이트와 앱과 '진료후 요약지'를 통해 자신의 진료 내용과 검사 결과와 처방전을 정확히 확인하고, 새로운 기술을 자신 있고 책임감 있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환자의 개인적 필요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


출산을 위해 이른 아침에 출산 병동의 소박한 1인실에 입원했다. 하우스나 굿닥터와 같은 미드들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병동이었다.


병실에 자리를 잡자 나만을 전담할 예정이라는 간호사가 화이트보드 앞에 펜을 들고 서서 앞으로의 계획과 현재 나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출산 과정에 대해 내가 생각해둔 것이 있는지를 묻고 모두가 참고할 수 있도록 화이트보드에 내용을 추가했다. 처음 경험하는 병원 1인실에 전담 간호사에 브리핑까지, 황송했다.


진통이 시작되면서 간호사의 도움으로 짐볼도 타고 자쿠지에도 들어갔다. 경막외 마취를 받은 후 다리의 감각을 잃고 누워있는 나를 위해 간호사가 30분마다 자세를 바꿔주고 태아의 심박동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자세를 바꿔주었다. 힘주기를 시작한 후 응급 수술을 결정하기까지 4시간 동안 간호사는 내 옆에서 힘주기를 도와주며 회음부를 마사지했다. 생애 가장 처참한 시간에 최고의 서비스를 받았다. VIP 병실이 이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사진. 입원 직후 전담 간호사가 앞으로의 계획, 현재 상태, 요청 사항 등을 기록한 화이트보드

퇴원 후 찾아본 출산 병동의 소개글에는 "우리는 모든 출산 계획이 당신의 의학적 필요뿐만 아니라 개인적 필요에 맞춰 조정될 수 있도록 각 가족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일합니다." (We work in close partnership with each family to ensure every birth plan is tailored not only your medical needs but your personal needs as well.)라고 나와 있었다. 간호사 대 환자의 비율이 1:1이 가능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간호사 대 산모의 비율이 1:3이었던 출산 후 병동의 서비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간호사 대 환자의 비율은 케어의 질뿐만 아니라 환자 안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참고. "간호사 비율 10% 높이면 환자 사망률 7% 감소시켜" (데일리메디팜, 2019/6/12)) 내가 출산한 병원이 위치한 워싱턴주는 정확한 간호사 대 환자 비율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병원들이 인력 배치 계획과 이후의 변경 사항을 주 보건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고, 실제 인력 배치가 계획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간호사가 직원배치위원회(the staffing committee)에 불만을 접수할 수 있다. (참고. 2017 Staffing Transparency and Accountability Act) 미국에서 간호사 대 환자의 최소 비율을 규정한 유일한 주인 캘리포니아 주는 출산(Labor & Delivery) 중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이 최소 1:2가 되도록 하고 있다. (참고. 간호사/환자 비율 정책(nurse-to-patient ratio) 동향 (의료정책연구소, 2020/1/16)) 미국 간호사 노동조합(National Nurses United)가 제안하는 비율도 이와 같다. 숫자가 어떤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림. 안전한 간호 제공을 위해 미국 간호사 노동조합(National Nurses United)가 제안하는 간호사 대 환자 비율 (출처. National Nurses United). 진통과 출산(Labor and Delivery) 중 권고되는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은 1:2, 출산 후 회복기(Postpartum) 동안 권고되는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은 1:3이다.


헬스케어 대신 헬스에 대해 말하는 보험사


집으로 배달된 KP의 독감 예방접종 안내지를 받고 한참을 쳐다봤다. 제목이 "독감 예방접종 안내"가 아니었다.


링크. 한국의 독감 예방접종 안내문 예


사진. KP의 독감 예방접종 안내문의 2020년 버전(위는 코로나 유행 전, 아래는 코로나 유행 이후)

KP는 '4가 독감백신 예방접종', '어르신 독감 무료 예방접종 안내'가 아니라,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했다. 코로나 유행 전에는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는 유쾌한 사진과 함께 "감기와 독감이 당신의 속도를 늦추게 놔두지 마세요. Don't let the cold and flu season slow your down."라고 말했다. 그리고 코로나가 유행하자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독감으로부터 보호하세요. Protect yourself and your loved ones from the flu".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기에 더욱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노인 커플을 배경 이미지로 사용한 당부가 이전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여전히 '독감 예방접종 안내'와는 결이 많이 다른 독감 예방접종 안내이다.


KP는 건강보험사가 동시에 헬스케어 서비스를 운영하는 HMO(Health Management Organization)의 대표주자이다. 미국에서 1980년대에 헬스케어 비용이 급상승하면서, 많은 건강보험사들이 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HMO와 같은 모델로 이동했다. HMO 보험들은 가입자의 케어를 관리하는 데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 1990년대에 헬스케어 비용 지출을 줄이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가입자들이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의사와 병원을 선택하도록 하고, 전문의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주치의(PCP)의 허락과 의뢰를 받도록 하며, 보험회사의 사전승인을 받은 경우에만 입원과 처치를 커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다양한 선택권을 중요시하는 미국에서 HMO에 대한 대규모의 반발이 생겼다. (참고. The Health Care Handbook: A Clear & Concise Guide to the United States Health Care System 2nd Edition)


2004년, KP는 자사에 대한 외부의 부정적인 인식을 해결하기 위해 광고회사인 Campbell Ewald과 협력해 Thrive('번성하다'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브랜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KP는 말하는 방식을 바꿨다. Healthcare에 대해 말하는 대신 Health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기능(features)이 아니라 혜택(benefits)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신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고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KP가 새로운 브랜드 캠페인을 런칭한 후 KP에 새로 가입한 회원 수는 백만 명 이상이다. (참고. CAMPBELL EWALD - Kaiser Permanente Case Sudy)


그림. Kaiser Permanente Thrive 캠페인 홍보물 예 (출처. Campbell Ewald)

소비자가 해마다 건강보험 상품을 비교해 새로운 상품으로 변경하거나 갱신하는 미국에서 헬스케어의  브랜딩은 KP를 포함한 모든 보험사들에게 중요하다. 2010년에 실행된 오바마케어(Affordable Care Act)에 따라 개인들이 연방정부나  정부가 만든 웹사이트에서 건강보험 상품들을 직접 비교해서 구입하게 됨에 따라 브랜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참고. Brand recognition influences consumers' health plan selection, (Healthcare Finance News, 2012/5/18))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건강보험 구입 역시 쇼핑이므로, 상품들의 혜택과 비용이 비슷할 때 브랜드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넷플릭스로 컨텐츠를 보고 아마존으로 쇼핑을 하는 소비자들이 건강보험 상품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갖는 기대치도 높아졌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미국의 건강보험사들이 언어를 바꾸고 캠페인을 하고 새로운 편의 기능을 추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참고. Why branding in healthcare is more important than ever, and how to connect with consumers (Healthcare Finance News, 2018/11/8))


환자를 후원자로 삼는 병원


출산 후 1달이 좀 지났을 때, 출산 병원인 오버레이크(Overlake)에서 "Thank you, Hyojin"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다. 출산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출산의 감동과 여운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때였다.


메일에는 Overlake를 믿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제는 Overlake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종합적이고 열정적이고 세계적인 수준의 헬스케어에 대한 필요가 매일 증가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첨단 프로그램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 오늘 후원함으로써 우리 커뮤니티에 멋진 케어라는 선물을 해달라는 메시지였다. 연결된 페이지에는 $25, $100, $500, $1,000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원하는 금액을 얼마든지 입력하고 후원하고 싶은 서비스 분야를 선택해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페이지가 있었다.


화면. Overlake에서 온 후원금 요청 메일

화면. 후원금 결제 화면 중 일부. 원하는 팀이나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고, 후원 금액을 공개하지 않고 원하는 직원에게 감사 표시를 전할 수도 있다. 아래 내용을 입력한 후 하단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병원이나 학교 등의 로비에서 기부자들의 명단이 담긴 대리석 기부벽을 보게 되면 누가 얼마를 후원했는지 살펴보곤 했다. 대리석이라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상징물은 기부가 대기업이나 자산가들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하게 했다.


사진. 워싱턴주 벨뷰 보태니컬 가든(Bellevue Botanical Garden) 입구의 기부자 명단. 기부 금액에 따라 글자 크기가 다르다. 왼쪽의 가장 큰 글자는 $1,000,000(약 10억 원) 이상 기부자, 오른쪽의 가장 작은 글자는 $1,000~$4999 (약 100만 원~560만 원) 사이 기부자들이다.

그런데 $25 아니 원한다면 $1이라도 후원을 하면 감사히 받겠다는 Overlake의 메시지는 신선했다. 큰 마음을 먹고 1,000만 원을 기부해 대리석벽 구석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겠지만, 임신과 출산을 무사히 끝낸 기념으로 예쁜 케이크를 하나 사고 특별한 외식을 한번 할 수 있을 $25, $100을 뜻깊은 일에 기부하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후원하거나 Overlake 직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후원할 수 있으며, 후원을 받은 직원에게 정확한 금액에 대한 공개 없이 당신의 후원에 대해 알려주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정받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감사의 표시로 팁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화된 미국에서 의료진에게 잊지 않고 성의를 표시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의 기억과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퇴원 환자에게 기부금 메일을 보내는 병원의 행동에서 주도면밀함을 느꼈다.


사실, 병원은 처음부터 나를 너무 환자로 대하지 않았다. 산과 응급실 침대에 눕자마자 동의서의 서명부터 요구하고, 입원실에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브리핑을 하며 내가 원하는 것들을 물어 계획에 포함시키고, 응급수술을 위해 수술실로 옮길 준비를 하며 정신없는 와중에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무작정 이들의 도움을 받는 수혜자이기보다 이들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의 입장에 가까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병원이 우리 관계의 끝에 이런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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