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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n 15. 2021

온오프라인이 하나로 - 4) 돌봄

헬스케어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아픈 가족이나 지인을 보살피는 '간병'이나 어린아이를 돌보는 '육아'는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일이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안 싱가포르의 사회복지 정부기관인 NCSS(National Council of Social Service)와 돌봄(caregiving)에 대해 이해하고 환자인 가족을 돌보는 가족 간병인(family caregiver)들을 돕는 서비스와 제도를 디자인하기 위해 Caregiving for Complex Needs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 팀에게 돌봄의 복잡한 이슈들을 알게 해 준 21세부터 78세까지의 가족 간병인 10명은 각자의 사정이 다르듯 돌봄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가족을 돌보는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배웠으며, 더 나아가 힘든 여건과 돌봄의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챔피언과 같은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당장의 역할과 부담에 지쳐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 같았고, 어떤 이들은 쳇바퀴에 갇힌 햄스터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한 가족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타입의 가족 간병인이든 도움과 지지가 필요했다.


사진. 가족 간병인 10명의 일상을 관찰하고 인터뷰한 Caregiving for Complex Needs의 필드 리서치 모습

10명의 가족 간병인들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줬다. 사람들은 때로 지쳐 피곤했고(tired)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일들로 인해 두려웠고(fear) 홀로 된 느낌에 불행함을 느꼈으며(isolated) 어디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 막막해했다(lost). 그럼에도 서로를 믿고자 했고(trust) 좋은 일이 일어날 거란 희망을 놓지 않았다(hope). 주위의 사람들은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을 측은히 여겼지만(compassion) 도움을 제공하는 일에는 자주 망설였고, 이런 상황에서 가족 간병인들은 눈 앞의 일을 자기 혼자 해결하는 것이 빠르고 쉽다고 믿었다. 싱가포르에만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으로 보였다. (참고. 2018년 싱가포르 대통령 디자인상(President’s Design Award Singapore) 수상작인 Who Cares? - Caregiving for Complex Needs 프로젝트 사이트)


참고. 가족 간병인들이 경험하는 일곱 가지 주요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에 대해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가족 간병인들은 위험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맡는 것에 사람들은 겁이 나고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지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 CDC의 2019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성인 5명 중 1명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이나 친구의 간병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 중 80%는 집안일을 돕고 50% 이상이 건강 관리를 돕는다. (참고. CDC Caregiving Data Factsheet https://www.cdc.gov/aging/data/infographic/caregiving.html) 많은 가족 간병인들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돌봄을 제공하며 그 가운데 고립된다. (참고. Home Alone Revisited: Family Caregivers Providing Complex Care (2019))


환자 포털이 일반화된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자녀의 대리인으로서 환자 포털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부 헬스케어 시스템들은 성인 환자의 가족 간병인에게 환자의 포털을 대리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정(proxy account)을 제공한다. 이는 아이와 환자의 건강 관리와 치료에 이들을 돌보는 가족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의사소통하기 위한 노력이다. 대리인 계정을 이용하는 가족은 아이나 환자의 진료를 예약하고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복용 약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의료진에게 상담이나 질문을 위해 메일을 보내고 답을 확인하고 질병과 치료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참고. Developing an Integrated Caregiver Patient-Portal System (Healthcare, 2021)) 참고로, 한국 정부가 2021년 2월에 발표한 의료 분야 마이데이터 플랫폼인 '마이 헬스웨이(MY HEALTHWAY)'의 도입 방안에도 돌봄을 맡은 가족이 권한을 위임받아 가족의 건강 기록을 관리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 흩어져 있는 내 건강정보를 한 눈에! '나의건강기록' 앱 (네이버 보건복지부 블로그, 2021/2/24))


이미지. 정부의 My Healthway 플랫폼 추진 방안

미국에서 성인 환자의 가족 간병인에게 환자 포털을 위한 대리인 계정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 환자의 가족 간병인은 필요시 환자의 포털 로그인 정보를 공유받아 환자의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환자들은 가족이 자신을 위해 환자 포털에서 자신의 검사 결과나 의사의 메일과 같은 정보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정신 질환, 약물 남용, 성병과 같이 편견이 있는 질환에 대한 기록과 의료비 청구 내역이 그대로 공유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우려했고, 본인이 아닌 다른 이가 어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어할 수 있기를 원했다. 가족이 환자를 돌보기 위해 환자의 포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대리인 권한을 갖게 될 때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설계가 필요한 이유이다. (참고. Insights Into Older Adult Patient Concerns Around the Caregiver Proxy Portal Use (Journal of Medical Internet Research, 2018))


아이의 출생 후 검진을 위해 KP Medical Center를 방문했을 때 부모로서 아이의 환자 포털을 이용하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해 대리인 계정을 등록한 후 KP 환자 포털의 내 계정에는 아이의 계정이 연결되어 있다. 덕분에, 아이의 진료를 예약하고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화상이나 채팅으로 상담을 받고, 처방전을 확인하고 약을 추가로 주문하고, 아이의 주치의에게 이메일로 연락을 하는 일을 내 계정을 이용하듯 웹과 앱에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KP 환자 포털에 내 계정으로 로그인을 했다 아이의 계정으로 바꾸기도 하고, 내 계정으로 로그인한 상태에서 아이의 상태에 관해 채팅 상담을 받기도 한다. 이 경우 상담 비용은 아이 앞으로 알아서 정산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언제까지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화면. KP 앱에서 내 계정으로 로그인 후 아이 계정으로 전환하면 대리인(proxy)으로 불려진다.

내가 이용하는 워싱턴주의 KP(KPWA)는 워싱턴주의 법(Washington state privacy laws)에 따라 부모나 법적 보호자가 12세 이하의 자녀에 대해 온라인에서 의료 기록 확인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자녀가 13세가 되면 약물 이용으로 인한 장애, 정신 건강, 성 및 생식기 관련 이슈와 HPV 백신과 같은 일부 예방접종 기록은 아이와 아이의 의료진만이 접근할 수 있고, 부모는 이에 접근할 수 없다. 그리고 자녀가 18세가 되면 아이는 부모의 관여 없이 독립된 성인으로서 모든 기능과 서비스가 가능한 자신의 계정을 이용하게 된다. 참고로, 13세는 미국에서 '아동 온라인 프라이버시 보호법(COPPA, Child Online Privacy Protection Act)'에 따라 인터넷의 성인 연령으로 받아들여지는 나이이다. 미국 관할의 개인 또는 법인은 13세 미만의 아동에 대한 온라인 개인정보 수집에 대해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18세는 미국에서 투표 가능 연령으로, 미국 내 대부분의 주들에서 성년의 기준이 된다. (참고. How 13 Became the Internet’s Age of Adulthood (WSJ, 20196/18))


미국에서 아이의 부모와 성인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환자 포털의 대리인 계정을 발급받아 진료를 예약하고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담당 의사에게 이메일로 상담과 질문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환자와 그 가족을 함께 치료에 참여시키려는 미국의 문화와 정책이 있다. 특히 미국 최대의 비영리 민간단체인 미국 은퇴자 협회(AARP)가 추진해 2015년 오클라호마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미국 내 약 40개 주에서 통과된 CARE(Caregiver Advise Record Enable) Act 법은 1) 환자의 의료 기록에 가족 간병인(family caregiver)을 지정하고, 2) 병원이 환자의 퇴원 전 가족 간병인에게 이를 알리고, 3) 병원이 환자의 퇴원에 앞서 가족 간병인에게 상처 관리, 처방약 관리와 같이 집에서 감당해야 하는 의료/간호 행위에 대해 교육을 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가족 간병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고 의료진과 간병인 사이에 파트너십을 만들어 간병인이 보다 자신감을 갖고 치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노력이다. (참고. Help for Families: CARE Act in Effect (AARP, 2015/11/1)


참고로, 미국의 병원은 환자를 가능한 일찍 퇴원시키기에 환자의 퇴원 후 가족 간병인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던 나는 내 건강보험이 정한 대로 수술 다다음날에 바로 퇴원했다. AARP의 조사에 따르면, 병원들은 CARE Act 법에 따라 가족 간병인들을 확인하고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일을 보다 공식화했고 이를 통해 환자의 재입원율을 낮추는 것을 목표에 포함시켰다. 가족 간병인들 또한 의료진과의 관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며 환자의 퇴원 시 보다 자신감을 가지는 변화를 보였다. (참고. The CARE Act Implementation: Progress and Promise (AARP PUBLIC POLICY INSTITUTE, 2019))


이미지. AARP가 환자 보호자들이 지갑에 휴대하도록 만든 CARE Act 지갑용 카드. CARE Act 법이 가족 간병인에게 보장하는 권리 3가지가 표시된 카드의 pdf 파일을 aarp.org/walletcards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바라보는 미국의 헬스케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그래서 미국의 헬스케어에 대해 좀 배워보자는 시도에 우려와 반감을 표하는 분도 있다. 그렇지만 어릴 적 논어에서 본 三人行 必有我師焉(삼인행 필유아사언, 세 사람이 길을 갈 때 그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라는 공자님 말씀처럼, 다른 이에게서 발견한 좋은 점은 배우고 나보다 못한 나쁜 점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KP에서 온오프라인을 하나로 만드는 환자 포털을 이용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이의 대리인 계정으로 아이의 주치의에게 메일을 보내고 진료를 예약하며, 그동안 수많은 디자인 워크샵에서 만들어온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컨셉들이 이미 구현되고 계속 개선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만들었던, 가족 간병인들을 위한 컨셉의 일부는 미국에서 이미 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악명 높은 시스템 안에서, 그럼에도 때로 멋진 일들을 버젓이 만들어가는 미국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우와'라는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과연 미국의 헬스케어가 못나기만 한가. 그래서 배울 필요가 전혀 없거나 배우려는 시도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오랜만에 공자님 명언을 기억하며, 이왕 시작한 이 일을 계획한 만큼 좀 더 가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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