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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Jul 10. 2021

고비용과 대안 - 1) 가성비 옵션

헬스케어디자이너가 미국에서 눈여겨본 일곱 가지

미국에 대해 흔히 하는 말들 중 하나가 "미국에서 함부로 병원 가면 파산한다"는 말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미국의 의료비는 선진국들 중 가장 비싸며 미국에서 일어나는 파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의료비이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함부로 병원 가서 파산'하게 되는 상황에는 '고비용'이란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함이 있다.


그림. OECD Health Statistics 2019 자료 중 201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의료비 비율. 미국은 OECD 회원들국 중 의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출처. OECD Health Statistics 2019 요약본) 

미국에서 건강보험 없이 지내던 시절, 고속도로를 달리다 바로 앞에 있던 승합차가 갑자기 도로를 가로지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간, ‘교통사고가 나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교통사고가 나면 앰뷸런스와 병원비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진통 중 경막외 마취를 받았고 결국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아파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마취과 의사를 병실에 이어 수술실에서도 만난 후 마취 관련 청구 금액을 확인하는 날까지 내가 부담해야 할 마취과 의사의 비용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기 어려웠다.


미국에서 병원을 이용하면 병원의 청구서 외에도 전문의들이나 검사 기관으로부터 별도의 청구서를 받는 경우가 생긴다. 의사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Kaiser Health News의 편집장인 Elisabeth Rosenthal은 이를 마치 비행기 티켓을 구입해 비행기를 타고난 후 공항, 기장, 부기장, 승무원들로부터도 청구서를 받는 상황으로 비유했다. 그의 책 An American Sickness에 따르면,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Pathologists), 마취과 전문의(Anesthesiologists), 영상의학 전문의(Radiologists), 응급의학 전문의(ER physicians) 말하는 PARE 그룹의 다수가 별도의 법인을 이루어 자신들의 서비스를 병원에 판매하며, 건강보험이나 보험사들과 계약을 하지 않은 채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보험 네트워크에 속한 병원방문할지라도  병원에서 자신의 건강보험에 속하지 않은 PARE 의사들의 서비스를 받게 되면 이들로부터 예상치 못한 높은 비용을 청구받게 된다. 앰뷸런스 회사들  많은 수도 건강보험 회사와 계약을 하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한  높은 비용을 청구한다. 건강보험을 가지고 있어도 깜짝 놀랄 만한 의료비용(Surprise Medical Bills)을 청구받을 수 있는 틈이 많다. (참고. Rosenthal, E. (2018). An American sickness: How healthcare became big business and how you can take it back. New York: Penguin Books.) 


한국에 살며 느낀 국민건강보험의 존재는 마치 '공기'와 같았다. 회사를 다니며 직장가입자 자격으로 건강보험을 이용하다 퇴사를 하면 자연스럽게 지역가입자로 전환이 됐다. 내 소속이 어디든 건강보험의 보장을 잃는 경우는 없었다.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르면, 국내 거주 국민은 국민건강보험의 가입자나 피부양자가 된다. 단,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의료급여와 유공자를 위한 의료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국민건강보험 가입에서 제외된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건강보험을 갖기 어렵거나 비용을 통제하기 어려운 '틈'이 많다. 65세 이하인 경우, 영구적인 건강보험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직장을 그만두면 직장을 통해 가입했던 건강보험도 잃게 된다. 이전 직장의 건강보험을 단기적으로 계속 유지하는 COBRA(Consolidated Omnibus Budget Reconciliation Act)가 있기는 하나, 직장에서 보조해주던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을 잃고 수입도 잃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보험까지 같이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 Reid, T. R. (2010). The healing of America: A global quest for better, cheaper, and fairer health care. New York: Penguin Book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의 2019년 논문에 따르면, 2013~2016년 사이 미국에서 일어난 파산의 66.5%가 의료 이슈와 연관되어 있었다. 파산을 한 사람들은 의료비가 너무 비싸거나 직장을 쉬게 됨으로 수입이 없어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직장을 통해 건강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은 정작 아플 때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중산층이라 해도 안전하지 않았다. 의료비 지불을 위해 노벨상 메달을 팔아야 했던 노벨상 수상자도 있었다. (참고. This is the real reason most Americans file for bankruptcy (cnbc, 2019/2/11))


미국의 온라인 대부업체 렌딩트리(lendingtree)의 2021년 2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급실 이용이 미국에서 의료로 인한 부채(medical debt)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응급 상황에서 방문한 병원과 그 응급실의 의사들, 그리고 앰뷸런스가 건강보험의 네트워크에 속하는지 확인하기 어렵기에 비용을 통제하기 힘들다. 의사나 전문의의 진료를 받는 것과 출산도 의료 부채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들 중 하나였다. (참고. 60% of Americans Have Been in Debt Due to Medical Bills (lendingtree, 2021/3/15))


그림. 렌딩트리(lendingtree)의 2021년 2월 설문조사 결과 중 의료 부채의 원인들. 응급실 이용을 원인으로 지목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미국에서 지출되는 높은 의료비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부분은 불필요한 응급실 이용이다. 미국의 주요 건강보험사인 UnitedHealthcare의 모회사 UnitedHealth Group이 2019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연간 응급실 방문 건수 중 2/3는 응급실 방문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 가능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연간 320억 달러의 비용이 지출됐다. 미국에서 응급실 방문 비용은 추가 시설 비용과 장비 및 직원의 간접비 등으로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는 비용보다 평균 12배가 높기 때문에, 미국의 건강보험사들은 회원들의 불필요한 응급실 이용을 경계한다. (참고. Unneeded ER visits cost nation's healthcare $32 billion last year (Houston Chronicle, 2019/7/24))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느껴질 때 응급실 방문을 결정한다. 하지만 의료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건강보험들은 결과적으로 진정한 응급이 아니었던 때의 응급실 이용은 '부적절하고 피할 수 있었다'라고 판단한다. 흉통으로 응급실을 방문했는데 심각한 심장 질환이 아니라 불안이나 소화 불량으로 진단을 받는 경우가 그러하다. 2017년 건강보험사 Anthem은 일부 주에서 결과적으로 응급실 이용이 필요하지 않았던 상황에 응급실을 이용한 경우 보험사의 지불을 거부하거나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가 사람들의 반발에 따라 일부 정책을 축소했다. 그리고 UnitedHealthcare도 2021년 최근 유사한 정책을 발표했다가 이에 대해 상당한 반발이 있자 코로나 유행 종료 시까지 새로운 정책의 시행을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의료진들은 건강보험사의 이런 정책이 실제 응급상황에서 환자들의 응급실 행을 주저하게 만들 것이라 우려한다. 그러나 건강보험사들은 사람들이 보다 적절한 환경에서 치료를 받음으로써 헬스케어를 보다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 UnitedHealthcare to crack down on ER visits, potentially exposing patients to bigger bills (Healthcare Dive, 2021/6/4), When Insurers Deny Emergency Department Claims (verywellhealth, 2021/6/12))


가성비 옵션을 계속 알려주는 시스템


17개월 아이가 문틈에 손가락을 다친 후 자꾸만 아프다고 손을 들이댔다. 한국이었으면 동네 정형외과 의원에 바로 찾아가 진료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차 의사의 진료를 예약하고 며칠을 대기해야 할지, 긴급한 치료가 필요할 때 좀 비싸지만 예약 없이 바로 가는 어전트케어(Urgent Care)에 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은 아니니 응급실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주치의에게 메일로 연락하고 하루 정도 답을 기다릴까 고민하다, 당장 상담을 받는 것이 나을 것 같아 KP의 Care Chat 서비스를 연결해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채팅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손에 멍이나 붓기 없이 잘 집어먹고 놀면서 이따금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에게 우선 타이레놀을 먹여보고, 증상이 계속되거나 나빠지면 대면 진료를 받도록 조언했다. 상담 후 주치의와의 진료를 예약해두고 며칠간 아이를 지켜보다 계속 손을 아프다고 들이대는 아이를 주치의에게 데려갔다. 주치의는 아이의 손을 살펴보고 움직임을 관찰한 후 골절의 가능성은 없으니 점차 나아질 것이라 얘기했다. X-ray 촬영은 필요 없다고 했다.


아프지만 긴급하지 않은 상태의 아이를 어디로 데려갈까 고민하며, 그동안 반복적으로 들어온 미국 헬스케어 서비스의 이용 기준에 따라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일까 생각했다. 건강보험사들은 회원이 상황 별로 비용과 편의를 고려해 보다 보다 비용효과적인 서비스를 선택하도록 지속적으로 가이드를 알려준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면 911에 연락하거나 응급실로, 클리닉 진료를 바로 받을 수 없을 때 급히 치료가 필요하다면 어전트 케어(Urgent Care)로, 클리닉을 예약해 진료를 받아도 되면 클리닉에서 'Your healthcare provider'를 만나고, 복잡하지 않은 증상에 대해 예약 없이 바로 진료를 원하면 의사 대신 NP(전문 간호사)나 PA(Physician Assistant)의 진료를 받는 리테일 클리닉(Retail Clinic)을 권한다. 그 외 KP는 언제든 의료진에게 온라인 상담을 받고 싶다면 개인의 비용 부담이 없는 Care Chat이나 Consulting Nurse 서비스 이용하고, 담당 의사에게 급하지 않은 질문(Non-Urgent Medical Question)이 필요하면 메일을 보내라고 말한다.


그림. 미국에서 환자들에게 누구에게 진료를 받고 싶은지(Who Do Patients Prefer to See?) 물었을 때의 답변. 미국 사람들도 당연히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급한 상황에서 의사와의 진료에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장 NP나 PA를 만나 진료를 받겠다는 비율이 높아진다. (출처. Askin, E., & Moore, N. (2014). The Health Care Handbook: A Clear & Concise Guide to the United States Health Care System 2nd Edition. St. Louis: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그림. 위스콘신주의 HSHS Sacred Heart Hospital이 홈페이지에서 보여주는 응급실과 어전트케어 선택을 위한 인포그래픽 가이드. 응급실은 흉통, 호흡곤란, 멈추지 않는 출혈과 같이 심각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일 경우에 선택하기를 권한다.

그림. 건강보험사 Anthem이 홈페이지에서 보여주는 응급실과 어전트케어 선택을 위한 가이드. 응급실은 심장마비 증상, 뇌졸중 증상, 머리 외상, 멈추지 않는 출혈, 심각한 알러지 반응과 같이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만 방문하기를 강조한다. (출처. https://www.anthem.com/what-to-know/)

그림. 건강보험사 Anthem이 홈페이지에서 보여주는 상황 별 케어 옵션 선택 가이드. 온라인 상담, 리테일 클리닉, 일반 클리닉부터 어전트케어, 응급실까지 각 옵션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과 비용에 대해 설명한다. (출처. https://www.anthem.com/what-to-know/)

마치 '범죄 신고는 112, 구조 신고는 119'처럼 이곳저곳에서 반복적으로 들은 가이드들이 머릿속에 공식으로 남았다. 병원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는 없고 함부로 아무 데나 찾아갔다 파산하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가성비 옵션을 선택하는 공식의 암기와 적용이 필요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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