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났다. 자주 보다가 가끔 보다가 아주가 끔 보게 된 친구. 서로의 물리적인 거리가 멀고,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친구를 만났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주말엔 부모님 집에서 지내는 걸 알고 있는 친구는 뭐하냐고 물었다. 본인은 김장을 하러 고향집에 왔고, 김장을 마쳤고, 서로의 시간이 맞는다면 커피 한잔하자고 했으며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집순이고 낯을 가리는 사람으로서 외출에 흔쾌히 동의를 한다는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결정이다.
누군가의 제안에 재빠르게 고민한다.
이불속에 누워 체력을 비축하는 편안함을 포기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드라마 정주행보다 즐거운가, 날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인가.
하지만 이 친구를 만날 때는 고민스럽지 않다. 피곤해도, 즐겁지 않아도 이 친구와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 참 값진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의지를 해본 기억이 많지 않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 혼자 알아서 잘. 피해 주지 말고, 피해받지 않고.
스스로의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될 때 나는 무너진다.
피해 주지 않으려 힘껏 애써왔는데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피해 주는 사람에게는 단호한 말조차도 할 수 없다니. 참 애석한 일이지 않은가.
우물쭈물하며 속앓이를 하고, 귀가 얇아 가스 라이팅도 잘 당한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단호함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 아니 이렇게나 단호하다고?'
말 한마디조차 군더더기가 없는 친구였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칼 같은 친구. 서로의 성격이 무척이나 달랐지만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둘은 언제나 서로를 배려한다. 굳이 서로를 이해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렇고 너는 그렇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지만 상대의 언행을 지적하지 않는 사이.
세상에는 다양한 이별이 있고, 각자 다른 의미의 이별을 하고 힘겹게 버텨내는 것이 전부인 듯 느껴지던 인고의 시간이 겹치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마음 깊이 공감하며 함께한 친구의 편안한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어른의 삶이 고단 한 건 시련의 종류가 다양해서인듯하다. 나에게 닥친 시련은 감당하고, 극복하거나 익숙해지다 평온해질 만하면 다른 이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다른 이가 소중하다면 상대의 감정을 어느 정도 함께 느끼게 되므로 역시나 고단하다.
난 이제 어른이고, 보호자이기도 하고 전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니 무겁지만 참아보는 것이다.
어느 날 느낀 깊은 슬픔에 울고 싶었지만 울지 않았다. 눈가와 미간을 잔뜩 힘을 주며 참아냈다.
슬픔은 소화가 되지 않는가 보다. 울고 싶은 순간 울음을 참아버리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온다.
친구와 함께 마주하고 웃고 떠들고, 시답잖은 이야기 끝에 소화되지 않은 슬픔을 꺼내놓는다. 덤덤하게 그렇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절대 숨기고 싶기도, 무거워서 꺼내놓고 싶기도 한 나의 부끄러움을 말이가.
'울고 싶었는데 내가 울면 안 될 거 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웃었어. '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서로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울고 싶을 때 전화하라고 말했다. 담백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떠났다.
슬픔은 소화가 잘되지 않아 다시 꺼내놓게 된다. 친구와 함께 한 시간 뒤에 속이 편해졌다. 소화가 되었다.
나의 소화제는 너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