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받치는 몇 가지 기둥
키가 한창 크던 성장통을 느껴본지도 20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대학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여러 가지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해외 생활을 시작하며 왜 그렇게 적응을 힘들어했는지 이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생활에 잘 녹아들었습니다. 아직도 낯선 곳에 가면 새로이 스며드는 것에 다소 시간이 필요한 정신과 몸뚱이인가 봅니다.
제 삶은 매우 안정적인 상황입니다. 기분의 변화도 없고 매일, 매주 주어진 것들을 해치우고 시간을 씁니다. 안정적인 심리상태가 된 이유에 대해 잠시 아내와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달리기, 글쓰기, 어학공부와 같이 주기적으로 해내는 것들이 생기고 삶에 적잖이 쌓여 빈 마음의 공간을 채워놓은 것 같습니다. 하루를 버티게 해는, 삶의 안정성을 받쳐주는 기둥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 회사에 다닐 때
회사에 다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하루를 가득 받치는 하나의 기둥입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최소 1/2 이상을 무언가를 해내는 공간, 그곳이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서 해내는 업무나 프로젝트들이 그 시간들을 뺴곡히 매일을 채워냅니다.
재직을 할 때에는 하루를 가득 채운 업무들 때문에 벌써 하루가 지나갔네, 집에 얼른 가서 쉬어야겠다와 같이 생각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회사 업무로 하루를 채우는 일은 스트레스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 보니 그것에 감사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좋든 싫든 업무는 나의 하루를 지탱하고 무거워 깔릴 뻔했던 하루의 무게를 견디게 해 준 굵은 한 개의 기둥이었습니다. 또한 집에 가면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과의 대화와 스킨십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 휴직 후
그런데 회사를 잠시 떠나며, 매일 수행했던 업무나 새로 생긴 업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곳 호찌민에 왔을 때에는 정보도 없고, 빨리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자꾸 생각을 하다 보니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주거, 자녀학교, 나의 성장 등 고민하고 수행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계속 헤매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이전의 생활 루틴은 다시 리셋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것은 글쓰기입니다. 일단 브런치 작가 등록을 목표로 52일에 한 번 꼴로 글을 써서 5개의 글을 가지고 심사를 신청했습니다. 이때까지 두 번 낙방의 경험은 있었지만, 이번 경험이 먹힐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작가로 확정되었습니다. 1주일에 1~2회의 업로드를 목표로 하고, 정보성 글보다는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어학당에서 하는 언어 공부입니다. 호치민대학교의 어학당에 등록하고 매일 2시간씩 주 5일을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도 아침 2시간을 보낼 수 있고, 또 어학을 배운다는 것이 저는 정말 재밌습니다. 복습을 해야 실력이 팍팍 늘겠지만 돌아오면 오전에 못한 청소를 하고, 아이들 하원을 하러 갑니다.
마지막은 운동입니다. 일주일에 3~4회로 30~40분 사이로 아침 달라기를 하고, 또 일주일에 두 번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매번 코치와 약속을 잡기도 귀찮긴 합니다. 하지만 일어나서 그냥 신발을 신으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러면 그냥 자연스럽게 30분은 이제 거뜬히 달릴 수 있게 되었고, 이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앞서 말한 세 가지 루틴이 현재 제 일상을 받치는 기둥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뜻깊고, 재밌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으로 저를 스스로 소중하게 대하고 하는 시간이 함께 합쳐져야 다양한 색깔의 기둥들이 하루를 받치겠죠. 제 일상은 하얀색이고 받치는 기둥들도 하얀색입니다. 마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모습입니다. 여기에 아이들과의 하루는 기둥과 지붕에 무지개색을 입히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아이들의 다른 모습에 일상의 색도 어제와 같은 색이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이전에는 일과 직무라는 아주 굵은 하나의 기둥으로 지탱해 온 회사생황에서, 현재는 중간 정도 굵기의 기둥들이 제 하루를 받치고 있습니다. 이걸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새로운 환경에서 무언가를 이뤄간다는 것, 만들어 간다는 것. 이것만큼 저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이들도 자신의 루틴을 만들고 있을 테고, 이렇게 성장해 가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해 보니 아이들과도 다양한 놀이들로 채워주면 제가 느끼는 것과 같은 생각에 이를까요? 궁금해지니 한 번 시도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