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의 질감이 달라서
우리는 ‘욕심’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사실 나 역시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그랬다. ‘흥부와 놀부’의 놀부가 욕심의 대표 주자 같은 느낌이랄까. 어릴 적 접했던 전래동화 속에서 '욕심'은 늘 나쁜 의미로 주입되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일까, ‘착하다’는 프레임에 갇혀 살아온 사람들은 욕심이란 단어와 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그렇다.
그런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불리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직장 상사는 내게 절실함이 부족하다고 했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 남보다 더 잘하고 싶은 경쟁심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해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단지, 상사가 말한 그 간절함과 욕심의 질감이 내 마음과는 다른 결이라서 오랫동안 까끌거림으로 남았다.
나는 정말 간절함이 없는 사람일까?
상사의 말이 반복될수록, 도대체 어느 정도의 욕심과 절실함이 필요하며, 그걸 어떻게 더 키워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 전공 관련 공부도 했고, 상사가 말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자료도 찾고 연구도 했다. (결국 이도 저도 흐지부지 되어버렸지만.) 절실함에 대한 책, 센스를 키우는 법에 대한 책도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건 책으로 배워지는 게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알지 못하겠는 그런 상태라고 할까. 그래서 더 답답하고 힘들었다.
나는 왜 이 지점에서 힘든 걸까?
이전 글에서 나는 ‘욕심’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내가 바라는 마음의 크기와 타인이 바라는 마음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불편함이 생긴다. 욕심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내가, 더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의 기준에 맞춰가려니 힘에 부치는 것이다. 반대로 욕심이 큰 사람은 왜 자신만 배려하고 이해해야 하느냐며 답답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구의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답답하고, 서로를 탓하게 된다. 어쩌면 ‘배려’라고 이름 붙인 그 마음조차, 또 다른 형태의 욕심일 수 있다. 결국 다른 마음을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정답이라는 게 있을까?
나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 까끌거리는 마음을 품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 마음을 한 구석에 몰아넣고 살짝 덮어두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매 순간 그 까끌거림이 신경을 건드리고, 정작 집중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계속 같은 곳을 찌르다 보면, 불편함을 넘어 고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그 까끌거림을 사포질이라도 해서 조금씩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그 덕에 이곳에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들춰보고, 정리하는 중이다. 이번을 계기로 다시 다짐한다. 어렵겠지만, 타인의 욕심과 기대를 내가 채우려 하지 말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처럼 하나씩, 차근차근해나가면 된다.
모든 것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