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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사장 Feb 17. 2024

가난이 다가왔다.

빛났던 가난한 우리들.


미국 유학생이던 우리들에게 IMF가 찾아왔고 유학생인 우리들에게는 직격탄이었다.

유학생도 신분계급이 있어서 IMF 이든 아니든 여유롭게 학교 다니고 집세내고 생활하는 이들이 있고 

가난을 직면했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렵게 살아 본 이들은 없어서 갑자기 찾아온 어려움에 당황했으나 즐겼었다.

유학생 신분 계층으로 보면 상민 혹은 천민이라 칭했으나 누가 그리 부르던 우리 자신이 그리 느끼던

그건 상관없이 빛나던 시기였다.

부모님들이 보내 주시는 금액은 IMF 전보다 조금 더 보내주시기는 했으나 학비내고 집세내면

빠듯했다. 학비는 대부분의 우리는 파트타임으로 수강신청을 했고 남은 시간은 알바를 구했고 나도 미술학원에서 파트타임 선생을 했었다.


늦은 가을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낮은 신분의 유학생 4명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건너편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의기투합해서 카페라테 한 잔을 사서 야외좌석( 네 명이 한잔을 주문하고 실내에 앉을 배포는 없었다)에 앉아

국 대접만 한 라테를 받아 들고 숟가락 네 개를 들고 있었다.

그렇게 숟가락 네 개로 라테를 떠먹다가 문득 한 명이 "나 부가 무엇인지 가난이 무엇인지 지금 알 것 같다"

라 했고 우리는 "말해봐" 했는데 그녀는 옆테이블을  가리키면서 "저게 부고 " 우리를 바라보면서 "이게 가난이야" 했다.

그녀가 가리킨 옆 테이블엔 늘씬한 백인분이 까만 탱크톱에 짧은 모피 코트를 입고 (늦가을이어서 굳이 모피까지는 입을 필요가 없었는데)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고 그녀의 개는 카페에서 제공한 빨강 방석 위에 엎드려 있었다. "봐 봐 부란 계절에 상관없이 옷을 입고 양에 상관없이 취향껏 즐기고 자신의 주변 것들에게 여유를 부여하는 거고 가난은 취향에 상관없이 효율성과 양을 우선시해야 하는 거야" 했다.

숟가락 네 개에 비친 우리의 가난.

 하지만 우리는 낄낄거리며 "그래 맞네 우리는 가난하네" 하고 말았다.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날 집세를 못 내서 집주인 피해서 우리 집에 모인 우리들.

-난 집세를 냈다 신기하게도-

내가 모아 두었던 동전 항아리를 세고 또 세서 피자 한 판 가격을 맞춰어 놓고 피자를 주문했다.

콜라를 시킬 돈의 여유는 없었다.

주문한 피자는 배달되었고 피자맨은 우리의 동전 항아리를 받아 들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세어 놓은 돈이라고 강조했으나 비쩍 마른 피자맨은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현관문 아래에 동전 항아리는 쏟아 놓고 세기 시작했다.

눈이 쌓여가는 현관문 앞에서 동전을 하나씩 세는 어린 피자맨, 

우리는 잠옷 위에 패딩을 걸치고 피자맨에게는 우산을 씌우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같이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한번 다 세고 다시 한번 세는 꼼꼼한 피자맨에게 "너 배 고프지?  피자 가져와 식었겠다 얘랑 같이 먹자"

해서 따끈한 커피를 내려 피자맨과 같이 피자를 나눠먹고 " 아 피자 먹다가 얼어 죽겠다 근데 맛은 있다"

했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 콜라 돈이 모자란 게 우리를 살렸네 여기에 콜라까지 먹으면 바로 즉사야"

했다. 추위에 퍼렇게 바들바들 떨던 입으로 피자를 먹던 피자 맨과 우리들 지금은 모두 중년을 훌쩍 넘겼구나.


한인 마트에서 유통기간 임박한 라면 사 쟁기기 바빴고 빵도 원더스 흰 식빵만 먹었고 일요일마다 열심히 

한인 교회에 나가서 떡국, 미역국, 비빔밥을 먹었었다.

화장은 학교 앞 백화점에서 어느 날은 샤넬로 어느 날은 디올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라의 여유도 한껏 맛보았고 (눈치도 안주는 나라 훌륭한 나라였다) 

유통기간이 임박한 라면을 섭취한 덕분에 얼굴에 뾰록지가 나고 뻑뻑한 미제 저렴이 식빵에 질려하고 피부에 맞지 않았던 화장품들 덕분에 괴로웠으나 우리는 웃었다.

여유 있는 신분계급 높으신 친구 언니 오빠 들은 틈틈이 우리를 챙겨 주었고 우리는 자존심 상해하기보다는

조금 부러워했고 마냥 고마울 따름이었다.

유명 건축학교 재학생이던 언니가 갈비 먹고 남은 뼈로 갈비탕 끓이겠다고 싸가는 걸 보고 우린 배워야 한다고 놀라워했고 우린 멀었다면서 한탄했다. -그 언니가 사준 갈비였다. 맞다 쿠퍼유니언 장학생 언니 -


지나고 보니 좋았다가 아니라 그때도 좋았다.

혼자 덩그렇게 있지 않아서 서로 웃고 있어서 지나갈 수 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흔적은 종종

모든 결제를 선결제로 하는 내 습관에서 내 돈보다는 남의 돈을 먼저 생각하는 나의 습관에서 나온다.

- 집세 내는 날이면 오전 여덟 시에 문을 쾅쾅 두드리시던 유태인 집주인 할아버지 정말 미웠었다.-

가난이랑 사랑은 못 숨긴다. 유태인 할아버지 감사하기도 하군.

그래도 추억은 아니다. 기억일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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