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집: 실리콘밸리를 떠나 삼청동 도깨비터로

by Nami

한 달 전쯤, 삼청동으로 이사를 왔다.

삼청동은 20년 전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한 번 와본 게 전부였다. 특별히 이곳에 살 마음도, 명상 스튜디오를 열 계획도 없었다.


당근마켓에서 우연히 한옥 스타일 매물을 보았는데, 자꾸만 눈에 밟혔다. 사진 너머로 온기가 느껴지는 집. 전통의 기운과 현대의 미가 조용히 어우러진 모습. 글을 쓴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솔직하고 고요한 기운에 이끌려 무작정 차키를 들고 그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특유의 나무 내음과 따뜻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집 앞에는 인왕산의 능선이, 뒤창 너머엔 신비로운 천연 바위가 서 있었다. 바위를 마주 보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건 그냥, 내 명상룸인데.’


집주인은 꾸밈없으나 우아했고, 세련되었으나 수수한 사람이었다. 급히 집을 비워야 한다는 기색 없이, 내가 공간을 충분히 느끼도록 배려해주었다. 다음 날 다시 그 집을 찾아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명상과 깨달음, 예술과 인생에 대해 흐르듯 나눈 대화들.

월세는 내 형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집착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인연의 흐름에 맡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믿지도 않던 점이 보고 싶어졌다. 이유도 없이 서울에서 일산의 작은 점집까지 차를 몰았다. 무속인의 눈빛은 강했고,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새로 시작할 일이 명상이라 하니, 그는 주소를 건네받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흠… 이건 도깨비 터네?”


도깨비 터.


주인의 기가 약하면 망하고, 기가 세면 흥한다는 곳. 변덕스럽고 장난을 좋아해 일이 잘 풀리다가도 갑자기 막히고,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곳. 선한 마음으로 베풀며 살아야 하고, 아무리 잘되어도 언젠가는 그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어야 하는 터.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가 좋았다. 선한 마음,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자세, 그리고 기가 센 주인. 모두 나와 닮아 있었다.


“자긴 기가 세니까 들어가도 돼.”


그렇게 운명처럼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좋았다. 모든 공간은 그저 스쳐 가는 곳이라 생각해왔는데, 이 집은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바위를 바라보며 명상하면 완전히 ‘홀로’가 된다. 그런데 그 고요한 홀로 있음이 전혀 외롭지 않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 아침마다 더해지는 새소리. 이곳은 나의 작은 낙원이다.


동네 슈퍼에서 만난 50년 지기 터주대감 어르신은 내가 이사 온 집을 단번에 알아보셨다. 뒷마당 바위에 조선시대에 새겨진 글이 서울시 문화재라는 것, 그리고 건너편 바위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병풍바위’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현대의 집들을 지워내고 상상해보니, 정말 바위가 병풍처럼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선 시대의 풍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삼청동 명상 스튜디오, 웨이블로(Wavlo).

내 안의 파동(Wave)이 고요한 흐름(Flow)이 되는 곳.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친구들은 테크 회사에서 승승장구 중이다. 샌프란시스코 맥킨지에서 컨설팅을 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던 나 역시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우연이 아니다. 돌고 돌아,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오게 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언젠가 다시 미국으로, 혹은 다른 세계로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고, 내 안의 예술혼을 깨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명상 중에 도깨비가 가끔 등장한다. 짖꿎은 장난을 치기도 하고, 내가 무리해 욕심을 낼 때면 슬쩍 경고를 준다. 초심을 잃지 않도록 나를 잡아준다.


도깨비야.

이곳에서 이롭고 좋은 일을 많이 할게.

지금 이 순수한 마음으로 따뜻함을 전하고,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할게.

이 진심을 절대 잃지 않을게.

때가 되면 욕심 없이 이 집을 다음 아름다운 존재에게 건네줄게.


그때까지,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