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조선의 재상들 2 : 태조조~연산조

by 남재준

https://youtu.be/7rhEQ_zNPE8?si=V6ZDjqzsbGXLriGF

1. 조준 _ 1346-1405 / 문하우시중 / 문하좌시중 / 문하좌정승 / 좌정승 / 판문하부사 / 영의정 / [평양부원군] / 개국공신 *조선 개국(1392) / 정사공신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1398) / 배향공신 *태조


증조부가 고려의 문하시중 조인규로서, 조인규는 몽골어를 잘하여 역관으로서 충선왕의 국구가 되어 한미했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가족관계에서 특기할 만한 다른 사항으로는 그의 아들 조대림이 태종의 차녀 경정공주와 혼인하여 태종과는 사돈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 급제 전에도 범상치 않았는지, 책을 끼고 수덕궁 앞을 지나자 공민왕이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벼슬을 내렸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고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폈으며 최영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무능한 지휘관들을 다스렸다. 나아가 강원도의 왜구들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는 권신 이인임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간 은둔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조준을 불러보고는 크게 등용하여 대소사를 자문하였다. 그 해 조준은 이성계, 정도전 등과 함께 전제개혁에 대해 협의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러한 상소를 해를 거듭하면서 3번을 올리니 이색 등 반대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신분 등 사회, 행정, 국방 등 국정 전반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고 마침내 1389년 전제개혁이 단행되었다. 1391년에 시행된 제도가 과전법인데, 이전의 전시과와 비교하면, 우선 관리에게 토지의 수조권(조세징수권)부여하는 제도라는 점은 같았으나,

1) 전국이 아닌 경기도만

2) 전현직 모두가 아닌 현직만 (즉 원칙적으로 물러나면 반납)

3) 전지(농토)와 시지(임야)를 모두 지급하는 것이 아닌 전지만 지급

했다는 데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잠시 정몽주의 탄핵으로 위기에 처하지만 곧 정몽주가 죽자 다시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결국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개국공신이 되고 문하우시중으로 임명되었다. 또 판삼군부사를 맡아 병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올리려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정안군 이방원을 지지했다. 1398년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과 더불어 태조에게 적장자를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해 정사공신이 되었다. 태종조에 이르러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한때 잠시 여흥민씨(원경왕후의 친정) 가문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태종 5년인 1405년에 사망했다.


Comment) 조준은 시, 경전, 역사 등에 능했다. 그의 저술에는 1397년 그 당시 기준 근 10여 년의 법제를 정리한 「경제육전」이 있는데 이는 후에 세조조부터 시작되는 「경국대전」 편찬의 중요 토대 자료가 되었다. 전제개혁에 강한 신념을 지니고 있어 과전법의 핵심인 사전화 방지(물러나면 반납), (전국에서) 경기 일대로 지급 토지를 한정하는 등의 내용이 그의 초안에서 나왔다. 그의 국정철학은 유교 원리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정도전과 유사하게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면서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을 지향했다.


요동 정벌에 반대한 근거는 다름 아닌 ‘민생’과 ‘현실’이었다. 새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시선이 그리 좋지 않고, 더구나 개성과 한양에서 부역을 지느라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요동 정벌의 부담까지 안길 수는 없다는 것이 첫째였다. 또한 명이 강건하니 현실적으로 볼 때 군사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둘째였다. 남은에게 이렇게 말하니, 그는 조준을 다만 재정 정도를 알 뿐 외교와 국방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는 취지로 모욕하였다. 이후에 정도전, 남은 등이 그를 견제하였으나 태조는 듣지 않았다.


관대하고 예의가 있으며, 업무에 있어 기강을 잘 잡고 철저히 하였다. 오래 권세를 잡아 사람들이 시기하였고 본인은 정승을 물러나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기도 하였다. 민무구, 민무질이 앙심을 품고 조준을 무함하여 곤란하게 한 일도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조준이 그들의 청탁을 거절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태종에게 일찍부터 「대학연의」를 주는 등 그를 계승자로서 지지하였다.


조선이 국가로서의 기초적인 체제 정비를 잘 이루어낸 것은 상당 부분 그의 공에 힘입었다고 하겠다. 개혁가이자 행정가 즉 한 마디로 ‘정책가’라고 할 수 있었다.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국정에 대한 원리와 비전이 있었으며, 동시에 과전법 등 구체적인 정책 연구와 입안 능력도 탁월했다. 요동 정벌 논의에서의 반대의견 취지를 보면 논리가 정연하다. 설계자와 운영자의 면모와 역량을 모두 갖추었던 매우 보기 드문 인재였다고 할 수 있다.


2. 구치관 _ 1406-1470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능성부원군] / 좌익공신 *세조 즉위(1455) / 좌리공신 *성종 보좌(1471)


세종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수양대군의 명으로 함길도에 파견되어 경성부사 이경유를 살해하였다.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이 되었고 후에 영의정을 지냈다. 건주위 여진족이 변경을 침범했을 때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구치관을 두고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말하였다. 예종 즉위 후 원상으로서 겸호조판서를 지냈고 성종 즉위 후에는 겸이조판서를 지냈다.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인사권을 행사할 때 집에 청탁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Comment) 세조의 계유정난과 즉위로 형성된 훈구파 중에는 홍윤성, 봉석주 등 악명이 자자한 사람들이 많았다. 세조도 이를 알고 진노하였으나 공신들을 우대하는 방침을 버리지는 않았다. 세조는 자신을 토사구팽의 상징인 전한 고제 유방에 비유한 것을 두고 불쾌해 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관을 지낸 수십 년간 청백리로서 구치관의 존재는 상당히 독보적이라 하겠다. 사관의 평에 따르면 구치관은 성격이 호불호가 분명하여 사람들에게 비난을 들었고 거짓으로 행동해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것은 강직하다 해석할 수 있고, 후자는 그가 가식을 떨었다는 특별한 증거가 없는 한 억지스러운 비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3. 최항 _ 1409-1474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영성부원군] / 정난공신 *계유정난(1453) / 좌익공신 *세조 즉위(1455) / 좌리공신 *성종 보좌(1471)


세종조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세종 말년에는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으로 임명되어 대리청정하는 문종을 보좌하였다. 문종 즉위 후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했다. 계유정난 때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이 되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이 되었다.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예종 즉위 후에는 원상이 되었다.

Comment) 유교에 기초한 의례와 제도를 위한 각종 연구와 편찬 등의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신으로서 세조조에 활약한 주요 인물 중 하나다. 최항은 내성적이고 신중하며 총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장(詞章)에 능하여 명에 보내는 표문과 전문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명 조정에서도 그를 칭찬했다. 다만 실록의 졸기에서는 다른 한편으로 최항은 우유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가 법제와 국방의 일을 물었을 때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재차 물었을 때조차 “옳습니다.”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아마도 정치인이나 관료보다는 문인이나 학자로서의 기질이 더 강했던 모양이다.


4. 노사신 _ 1427-1498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선성부원군] / 익대공신 *남이의 옥(1468) / 좌리공신 *성종 보좌(1471)


가족관계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세종의 국구이자 상왕 태종에게 숙청당한 심온의 딸이 어머니라는 점이 있다. 또 그의 후손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있다. 단종조에 출사하여 세조조에는 최항과 더불어 「경국대전」 편찬을 총괄하였다. 1467년에는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우고, 1468년에는 남이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성종조에는 호조판서로서 평안도, 경기도의 재해 극복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연산조에 이르러 영의정에 올랐는데, 1498년에 무오사화가 발생하여 유자광 등이 <조의제문>의 일을 근거로 김일손 등 사림을 제거하려 하자 미온적으로 동조하면서도 옥사가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그해 9월에 사망하였다.


Comment) 소탈한 성격으로 재산 증식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유교 경전은 물론이고 사서와 불경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학문적 관심을 보였다. 성종조에 영의정을 지낼 때 왕이 대간에게 노여워하여 잡아다 국문하려 할 때 기쁘게 동조했다 하고, 한 유생이 부처에 대해 간하자 귀양을 보내는 데에도 동조했다. 이에 사림이 그에게 이를 갈았다고 실록의 졸기에서는 적고 있다. 하지만 그다음 문구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忮害, 해침)하는 일은 없었다.’ 무오사화 때 유자광 등이 사림을 일망타진하려 하니, 노사신이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후한)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당고의 금 즉 후한 말에 권세를 쥔 환관들에 대항하던 청류파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건), 청의(淸議)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하였다. 이를 통해 살아남은 선비들이 많았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알 수 있다. 우선 왕이 대개 사림 출신일 대간과 유생을 벌하는데 동조한 부분을 보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그가 훈구파이자 관학파로서 사림파의 잡학이나 불교 및 강한 왕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대해 반대하고 견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에게 아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선 그 시점에 이미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영의정이었는데 왕에게 새삼 아첨해서 더 얻을 것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소탈한 성품이었다는 처음의 평가와도 맞지 않는다. 게다가 바로 다음의 문장이 남에게 해를 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하니, 결국 해당 사실들은 성종조에 대간과 사림에 관대하면서 반사적으로 다소 위축된 왕권을 위해 힘을 실은 취지로 보인다. 후에 무오사화 때 ‘청의가 아래에 없게 해서는 아니 된다’라는 취지로 사림을 상당히 많이 살렸다는 점을 보더라도 그가 사림에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 재상이었다고 하겠다. 다만 불행히도 연산군은 노사신 사후 본격적으로 폭주하였고 결국 연산군의 치세는 중종반정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생각하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오해 2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