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광필 _ 1462-1538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배향공신 *중종
성종조에 출사하고 연산조에는 사냥의 잦음을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10년에는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512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서 기민 구제에 힘썼다. 1513년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3년 뒤인 1519년 기묘사화가 발생했을 때 조광조를 구명하려다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515년 장경왕후 사후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의 발호를 사전에 막기 위하여 대간과 더불어 새로 왕후(문정왕후)를 맞도록 하였다.
기묘사화가 있던 1519년 중종의 구언(求言)에 의해 한충이 정광필을 가리켜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니 신용개는 선비가 대신을 배척하는 풍토를 근절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광필 본인은 젊은이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1531년 70세가 되어 궤장을 하사받았다.
1533년에는 김안로의 득세로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김안로가 정광필이 장경왕후의 국장 때 능지를 불길한 곳으로 잡았다고 무고하여 김해로 유배되었다. 정광필은 김안로의 아들이자 중종의 부마였던 김희가 목장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였는데 이것이 김안로의 앙심을 산 것이었다. 4년 뒤에 김안로가 사사되자 영중추부사로 복귀했다.
Comment) 실록의 졸기에서 사관의 평에 따르면, 정광필은 아름답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이, 규각(圭角, 남과 뜻이 달라 어긋남)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듯하여도 나라의 대사를 당할 때에는 의젓한 기절이 있었다. 정광필이 김안로에 의해 무고를 당해 유배되었을 때, 김안로가 사람을 보내 정광필에게 이르기를, ‘조정이 마침내 큰 화를 내릴 것이니 미리 자진하는 것만 못하다.’하니 정광필이 답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어찌 사람의 말로써 스스로 생명을 끊겠는가. 조정이 비록 주륙(誅戮, 죄를 물어 죽임)을 내릴지라도 나는 애석해하지 않는다. 다만 주상의 명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됨의 성숙함과 의연함이 실로 이와 같았다.
김안로가 사사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니 저자의 아이들부터 말을 조는 졸병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만백성이 정 정승이 돌아왔다며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죽으니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재상의 모범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다. 사실 영의정을 지내긴 하였어도 정광필은 실권을 잡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러한 높은 자리에서 삐끗하는 경우 김안로의 언급처럼 ‘대화(大禍)’를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광필은 일관되게 조정의 영수로서 보여주어야 할 자세와 해야 할 말을 하였다.
전한 문제가 진평에게 재상의 직분을 물으니 진평이 답하기를 ‘위로는 황제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를,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맡은 바 직책을 완수시키는 것이 승상의 할 일입니다.’라고 하였다는데, 이러한 재상의 직분을 정광필은 매우 모범적으로 수행하였다. 왕이 기묘사화나 외척의 발호 등을 확대하거나 용인하는 것을 막았으니 군주를 보필한 것이며, 백성을 위한 행정에 힘쓰고 또한 백성들이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으므로 만민을 다스리고 만물을 조화롭게 한 것이다.
특히 자신을 탄핵한 대간에 대한 관용과 자신을 제거하려던 권신에 대한 태연에서 알 수 있듯, 강강약약이었다. 앞서 말했듯 정광필은 당파에 크게 의지한 것도 아니고 권세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므로 본인이 조금만 잘못해도 잘못될 수 있었으며 중종의 치세는 특히나 권신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시대이었으므로 재상으로서 단신으로 그러한 자세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광필은 일관되게 자신을 공격했던 사림을 구명하고자 애쓰고 권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소신을 가지고 아뢰었으니 오늘날까지 기억해야 할 정승이라고 할 수 있다.
2. 남곤 _ 1471-1527 / 좌의정 / 영의정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성종조에 출사하였다. 갑자사화 때 서변으로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으로 2년 만에 풀려났다. 김공저, 박경에 대한 모반 무고(본인이 모반 자체를 고변했다기 보다는 연관자로서) 때 가선대부가 되었고 정광필의 추천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15년 장경왕후 사후 폐비 신씨(단경왕후)를 복위시키자는 소가 올라왔으나 유순정 등과 더불어 반대하였다. 1519년에 기묘사화를 기획하여 조광조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데 참여한 뒤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에 올랐다. 사후 명종조에 관작이 삭탈되고 선조조에 추삭(추가로 벼슬을 삭탈)되었다.
Comment) 남곤은 기묘사화의 기획자로 비판을 받았으나 재평가의 여지가 많다.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그는 평생 화려한 옷을 입지 않고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다. 전횡에 대한 기록도 없다. 게다가 남곤은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며 조광조는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굉필의 제자였다. 즉 남곤은 시작이 사림이었고 관료 생활을 거치며 점차 현실 감각을 길렀다. 부나 권력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기묘사화를 기획하였는가?
남곤은 조광조와 사림파가 제안한 여러 정책 현안에 관하여 건마다 충돌하였다. 우선 남곤은 사장(詞章) 즉 시와 문장에 능하였고 이를 중시하여 경학(經學)을 강조하는 조광조의 사림파와 대립했다. 사장과 경학은 모두 과거의 과목이었다. 경학은 유자로서는 당연히 보아야 했고 사장은 명에 보내는 표전문 즉 외교문서나 정책 현안에 관한 견해를 논술하는 것이었는데, 수학과 의학 등 잡학보다 유학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해 세조의 노여움을 산 김종직처럼 조광조는 사림으로서 경학을 더 중시했다. 하지만 실무 관료의 사고에 더 가까웠던 남곤은 사장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또한 과거제 자체를 놓고도 대립했는데, 조광조와 사림파가 제안한 현량과 즉 천거제로 과거제를 대체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양 제도를 병행하자는 의견을 냈다.
국방 현안에 관하여서도 충돌하였는데, 1518년에 북변에서의 여진족 속고내의 약탈이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 비밀리에 토벌대를 파견토록 계획을 입안하였으나 조광조는 이러한 ‘속임수’를 반대하였다. 무신 유담년은 안보의 문제에서는 문신이 아닌 무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반박하였으나 여론을 주도하는 사림은 당연히 조광조의 편이었다. 이때에도 남곤은 조광조에 반대하며 유담년의 편에 섰다.
계속되는 충돌을 거치며 자연히 사림파는 ‘원래 적이었던 자보다 아에서 적이 된 자가 더 미운’ 이치로 남곤에게 앙심을 품고 공격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어떤 뚜렷한 혐의점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반대로 냉철하기 그지없었던 남곤은 결국 사림의 발호는 그 뿌리가 조광조에 있으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하지만 기묘사화의 밤과 그 이후에도 남곤은 조광조의 사형은 지속적으로 극력 반대했고, 조광조를 구명하려다 중종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을 위기에 처했던 정광필에 대해서도 처벌에 반대했다.
그 후 영의정을 맡아 보면서 어머니 장경왕후의 사망으로 기댈 데가 없었던 세자 이호(후일 인종)의 후견인이 되었고 또한 권신 김안로의 발호를 강하게 경계하여 그를 유배 보내도록 청하여 이를 관철하기도 하였다. 임종 때에는 자신이 쓴 글들을 불태우며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 했고, 또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하지 말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시호(諡號)를 청하여 비석을 세우지 말라.’라고 하였다. 아마도 기묘사화에 대한 깊은 후회와 죄책감이 남았던 것은 아닐지.
대체로 조광조의 문제의식 예컨대 선비들의 기강 해이나 유교 원리보다 실무 지식과 감각을 강조하는 조정의 풍조, 아직 온전히 자리 잡지 않은 민간의 생활 유교 등에 관하여 남곤은 대척점에 있을 정도로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비현실적이거나 급진적인 주장에 앞장서 반대하거나 보다 중도적이고 온건한 대안을 내놓았고, 이는 정광필 등도 같은 기조였으나 그가 정광필처럼 아예 윗세대가 아니라 약간 선배 정도였다는 점에서 변절이라는 사림의 경멸을 산 것 같다. 그리고 이때의 ‘조광조 신드롬’은 대단하여 정광필도 남곤도 모두 조광조를 크게 기용하라고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남곤은 결국 대립 끝에 반대에서 더 나아가 조광조를 정치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까지 내린 듯하고, 아예 조광조를 죽이려던 중종의 의도가 맞아떨어져 기묘사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후에 김안로를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결국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다(또는 못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는 점을 보면 중종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조광조는 반드시 죽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권력을 몰아주었다가 순식간에 판을 뒤집어 엎어버린 왕에게 제일 큰 책임(중종은 계속 이런 식으로 왕권을 유지했다)이 있었으나 왕을 비난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 결국 남곤 등에게 모든 비난이 돌아갔다. 이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3. 이준경 _ 1499-1572 /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 / 배향공신 *선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갑자사화를 당하여 사사되어서 형 이윤경과 함께 6세의 나이로 목숨만 건져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1531년에 과거에 급제해 출사하였고 경연에서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파의 무죄를 역설하다 권신 김안로 일파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사사 후 복귀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평안도관찰사 즉 지방관이었으므로 중앙의 풍파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1550년 영의정 이기의 무고로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1553년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들을 달래고 타일렀다. 1555년 을묘왜란 때에는 왜구를 격퇴하였다. 3년 뒤에 우의정에 오르고 다시 2년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156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67년에 어린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신원하고, 사림으로서 장기 유배 생활을 하던 노수신과 유희춘 등을 석방하였다. 하지만 기대승과 이이 등 당시의 신진 사류와는 뜻이 맞지 않아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임종 때 선조에게 붕당의 조짐을 염려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것이 이이와 류성룡 등 신진 사류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현실이 되어 동서분당이 발생하게 된다.
Comment) 우선 이준경의 유언은 약간 더 맥락적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이준경이 붕당의 조짐이라 여긴 것은 선조조 초에 수렴청정했던 인순왕후(의성대비)의 동생 심의겸을 두고 한 말이었다. 심의겸은 외척이긴 했으나 이황의 문인이었고 이이, 성혼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외삼촌 이량이 권신화되자 그를 탄핵하기도 하였다. 즉 심의겸은 외척이면서도 사림으로서의 정서가 강했다.
그가 김효원이 윤원형의 식객이었음을 들어 이조정랑 취임을 반대하였고 김효원이 다시 심의겸이 외척이라는 점을 들어 반격하였다. 결국 이러한 분당의 촉매가 되는 쟁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본래 심의겸과 가까웠던 성혼, 정철 등이 서인이 되고 이황, 조식 등 명종조에 대유(大儒)로서 활약한 이들의 제자들이 대개 동인이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4편에서 후술하겠지만 이이는 본래 중립에서 양측을 조정하려 하였지만 결국 서인의 입장이 되고 사후에는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받게 된다).
이준경이 정확히 어디까지 내다본 것인지는 더 많은 사료들의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즉 단순히 ‘심의겸이라는 특정인이’ 기질이나 언행으로 보아 파당의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도의 예상이었는지 전체적 형세와 흐름으로 보아 붕당이 확대되고 고착화되기에 이를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까지 보았는지는 불확실하다.
본래 붕당은 그 자체로서는 유교에서 부정적으로 여기는 바였으므로(다만 구양수는 「붕당론」을 지어 이를 다시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으로 나누어 군자의 당은 옹호할 수 있다 하였고, 이는 이이의 조정 과정에서 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동서 모두 군자의 당이니 서로 화합하자는.), 결국 이준경이 죽으면서 심의겸을 염두에 두고 비판했다면 심의겸과 가까운 친구 이이나 같은 이황의 제자였던 류성룡까지 비판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이이 등이 이준경을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말이 선해진다는데 이준경은 말이 악하다’라는 취지로까지 비난한 것이었다.
이준경 자체를 놓고 보면, 그는 훈구의 완전한 소멸과 사림의 집권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마지막 기성세대였다. 관직 생활 초기부터 조광조 신원을 주장하고 결국 이를 관철한 것을 놓고 볼 때 사림에 반대되었다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이 등 사림 집권 시에 떠오른 청년 세대의 관점에서는 명종조에 정치에 몸담았으면서도 을사사화 등 문정왕후(성렬대비)와 윤원형 등의 전횡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 변화의 마지막 경계에서 주류 교체가 자연히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이미 젊었을 때부터 사림의 편이었던 이준경으로서는 ‘기득권’처럼 몰리는 것이 억울했을 것이다.
한편 이미 조광조 아니 어쩌면 그로부터 한참 이전에 형성되어 반복되던 양상이 이때에 종결되었다. 즉, ‘여러 학문을 섭렵하고 행정 실무와 (상대적으로) 왕권 보좌를 중시한 관학-훈구 그리고 사림 중 행정 경험을 쌓으면서 중도화된 집단’과 ‘향촌에서 시작해 성종조에 김종직을 필두로 조정에 등장하고 연산조~명종조의 사화라는 고초를 겪고 드디어 온전히 집권한 유교 원리로 무장한 사림’ 간의 대립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사림이 온전히 기성세대가 되고, 훈구-관학은 사실상 없어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변동은 조선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아가면서 조선 사회 전체가 이전보다 더 민간 생활 수준에서까지 유교 원리가 정착되는 사회변동·문화변동의 양상과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신에 동서분당, 남북분당, 노소분당, 시벽분당 등 대략 2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림은 이제 붕당정치로써 나뉘어 논쟁하고 정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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