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에서 사람으로 :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아야

<더 메뉴>의 앤 레브랜트를 위한 변론 (스포일러 있으니 유의 바랍니다)

by 남재준

1979년 7월 15일,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2024) 미국 대통령은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정체성은 더 이상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에 의해 정의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왔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상품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는 것이 목적이나 확신 없는 우리 삶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배워 왔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1977~1981).


이는 전후의 절정에서 위기의 과도기로 이어지고 있었던 70년대 미국의 자기 확신 상실과 본질적 문제 외면 및 소비주의(Consumerism)로의 회피를 적확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다음 해 대선에서 그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진실은 미국을 여전히, 그리고 더 강하게 지배했다.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은 ‘삶은 버릴만해(Life is Worth Losing)’라는 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효율적이고, 전문적이고, 강박적인 소비자들이야. 그것이 그들의 시민적 미덕이지. 소비 말이야. 그게 그들의 새로운 국민적 오락이야. 야구는 엿 먹으라고 해. 소비야. 오직 단 하나의 남아있는 진정한 미국적 가치야. 물건을 사는 거지. 물건을 사는 거야.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도 없는 것에 돈을 써대지. 필요도 없는 것에 없는 돈을 써. 그래서 신용카드 한도를 최대로 하고 그걸 초과해서 남은 평생 12달러 50센트짜리 물건에 18% 이자를 내고 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집에 가져갔을 땐 싫어할 거야. 똑똑한 게 아니야. 절대로 빌어먹게 똑똑하지 않지.”


소비주의는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를 은폐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 문제는, 아마도 소비력 즉 소득과 재산의 총합이라는 부 그리고 그것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계층·계급 나아가 그것이 부여하는 사회적 명예와 정치권력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소비의 객체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가장 크게 가치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것은 요리(Culinary Art)이다.


영화 ‘더 메뉴(The Menu, 2022)’에서 ‘사람을 먹이는 것의 보람과 아름다움’이라는 요리의 본질을 잃고 소비주의와 탐욕과 허위의식과 계급적 권력 등의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던 호손 레스토랑의 셰프 줄리언 슬로윅(Julian Slowik, 랠프 파인즈 배우)은 결국 최후의 만찬이자 그 자체로 죽음으로 가는 살인의 과정을 기획한다.


그의 ‘세상에 대한 분노’는 ‘사람에 대한 분노’로 상징적으로 환원된다.


하지만, 과연 그게 모두에 대해 타당한 것이었는가?


나는 슬로윅이 죽인 사람 중 앤 레브랜트(Anne Liebbrandt, 주디스 라이트 배우) 여사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앤 레브란트.

이 글은 바로 그녀를 위한 변론이다.


앞서 서두에서 ‘소비주의’와 ‘계급’ 등에 대해 언급했는데, 정확히 이것들이 슬로윅이 앤과 그의 남편 리처드에 대해 건 죄목이었다.


이 장년 부부는 호손의 단골고객으로서, 한 끼에 180만 원이나 되는 비용을 11번이나 부담할 정도로 거부(巨富)였다.


살인의 의도가 본격화되자 공포에 질린 리처드는 탈출하려다 손가락을 잘리게 되는데, 그 후 슬로윅이 물은 질문은 ‘이제껏 여기에 와서 먹은 음식 중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있느냐’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물론이고 앤도 그걸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슬로윅은 식사가 시작될 때 ‘그저 먹지 말고 제대로 음미하고 감상해달라’라는 취지로 말했지만, 부부의 넘쳐나는 부 속 무지와 무감각이 이를 덮어버린 것이었다.


이건 사실 ‘물질적으로 너무나 넘쳐나서 자기가 향유하는 것의 고귀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졸부’라는 ‘스테레오타입’을 부부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계급이나 스테레오타입을 모든 사람에게로 간단히 돌려버리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모든 부자가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상징과 개념을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환원시키는 건 부당하다.


부자들이 겪는 불행이 단지 물질적으로 빈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낫다는 이유로 반드시 빈자들보다 가볍게 처리될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 부자들이 반드시 날 때부터 부자이리라는 보장이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앤의 남편 리처드의 경우는 변론의 여지가 별로 없다.


슬로윅의 말 그대로 그는 소비주의에 탐닉했는데 그 정도의 수준이 ‘매춘부를 고용해 자기 딸을 연기시키며 그 앞에서 자위를 하고 자기에게 (성적 바이브로) 응해달라’라는 것이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앤은 그런 묘사가 없다.


내 생각엔 작중에서 리처드와 앤 사이에는 계속 이혼 기류(Divorce code)가 흐르고, 그들의 부는 단지 결혼의 불행을 은폐하는 연막일 뿐으로 보였다.


앤은 타일러와 함께 온 마고(에린)가 자신의 딸과 닮아 눈에 밟혔고 그것을 리처드에게 넌지시 말했는데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음을 돌려 말하고 남편이 스스로 자백하고 잘못을 빌건 뭘 하건 결론을 내리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여성 고객들만의 요리 ‘남자의 어리석음 Man’s Folly’처럼, 리처드는 그저 앤이 마고의 언급을 하는 것 자체조차 불편해하며 덮어버리려 한다.


앤은 자주 묘사되지 않는 등장인물이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은 극 내내 이 장년 여성의 서사 코드가 된다.


각자의 치부가 프린트된 토르티야를 받았을 때도 마고와의 사진이 담긴 리처드의 것과 달리 앤의 것에는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라고 되어 있었다(그럼 앤의 치부라고 할 만한 게?).


남자의 어리석음을 먹는 여성들만의 자리에서도 앤은 그저 건조하게 마고에게 자신이 그녀가 남편과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안다는 취지로 질문한다. (화가 난 묘사는 없다)


앤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혼하거나 그날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 않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자신과 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라던가 장년 세대의 이혼에 대한 부정적 인식, 여성으로서의 모욕감과 사회적인 위신 추락 등.


앤은 부유한 백인이긴 했지만 여성으로서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소비주의가 맞다손 치더라도 앤에게는 리처드와 달리 그 구조화된 부가 각별히 자신이 원해서 얻거나 한 것도 아니었을 것 같다.


그것도 슬로윅의 불행처럼 세상이 옴짝달싹 못하게 사람을 가둔 틀이었다.


그런 삶을 견디는 상황 속에 열 번이건 스무 번이건 앤에게는 음식도, 마사지도, 여행도 그 무엇도 즐기기는커녕 제대로 느껴지지조차 않았을 수 있다.


예술을 예술답게 감상하는 것이건 부를 무지하게 누리는 것이건 앤에게는 자신의 실존적, 관계적 고통의 감내가 더 우선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슬로윅의 기획 살인 기준은 앤에게는 과하게 이념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단면적이다.


막바지에 유일한 탈출자인 마고가 레스토랑을 돌아보았을 때, 손을 가볍게 휘저은 앤의 행동은 ‘젊은이라도 살아서 나가라’라는 체념과 인간성을 보여준 거라고 생각한다.


최후에 슬로윅의 말에 앤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건 패닉의 극한에서 정신을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단계에 이른 여성의 묘사가 아닐까 싶다.


Bittersweet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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