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만난 내 또래의 20대 남성들은 놀랍게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자연스럽게 또는 당연히 자신이 언젠가 '처자식을 건사하는 가장'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이건 20대 남녀 젠더 사이에서의 결혼에 대한 인식 차이와도 무관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인식이 페미니즘의 필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우선, 아이를 낳는 것이야 '일반적인 인생 계획ㆍ통과의례'의 맥락에서 그렇다 치자.
하지만 '가장'은 위계와 서열을 내포한 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가장이라는 건 통상 가부장제 하에서 가족의 수장으로서 의사결정권을 쥐는 남성을 의미해 왔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자신이 여성을 건사한다는 듯한 표현도 자연스레 등장한다.
자기의 존재와 자기중심성에 대한 인정 욕구가 남성성의 중요 요소 중 하나이다.
실제 귀결이 어떻건 집에 돈을 대는 사람(breadwinner)이 남성이고 가장이 된다는 문제적 인식이 은연 중에 깔려 있다.
이런 식의 자기중심적 인식은 병폐이다.
실제로는 돌봄ㆍ관계ㆍ가족 자체가 주는 사회적 위상 등을 무시한 채 다른 가족 구성원을 대상화하여 가족의 불행을 가져온 수많은 현재완료진행적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런 인식 자체가 생활 속에서 절절히 느껴지는 가족 내 민주주의의 부재 문화를 통해 드러난다. (윗세대로 갈수록 심해지고, 결국 인척 등으로 아랫세대에도 영향 e.g. 고부관계)
20대 남성들이 주장하는 '성평등 달성, 역차별 문제'가 허상임을 그들 스스로가 방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남성성ㆍ가부장적 정체성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이건 그들의 잘못이라기 보다 시간ㆍ노력이 필요한 문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또 일부 20대 여성들의 현학적이고 캠퍼스ㆍ자기세대 중심적(데이트폭력 등) 논의들이 생활과 실존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음도 함께 보여준다.
젠더는 세대를 뛰어넘는다.
3040 여성들이 겪는 유리천장과 양육 전가(슈퍼맘), 50+ 여성들이 겪는 위선적인 가부장적 가정 문화 등은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며 사회문화적 문제이다.
가정 내 민주주의 달성을 위해 페미니즘과 여성정책은 아직 뚜렷한 존재 의의를 가진다.
아이가 엄마를 찾게 된다는 것도 꼭 생물학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되려 사회화된 모성애된 돌봄(그리고 사회화된 돌봄에 미숙한 부성애)로 인해 여성에게 양육을 전가하는 명분이 된다.
게다가 한부모가정의 경우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봄이 집중되고 여기엔 문제가 없는데 이것이 문제인 것처럼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한부모가정이 꼭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고 자발적 선택에 의하더라도 온전히 자발적이지만도 않은 경우들이 상당하다는 점을 감안하자.
민주적 가족을 생각할 때, 여성주의를 빼놓을 수 없고 또 여성주의는 추상적 이론보다는 이러한 일상적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적 사회운동의 흐름이 과연 이런 '작은 목소리'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현학적 정의 놀음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본에서 사회당이 아닌 공명당이 주부 등 사회적 취약 계층을 흡수했음을 생각해보자)
어떻게 보면 자기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일에서 출발하는 인문학ㆍ사회운동이 가장 진정한ㆍ깊은 인문학ㆍ사회운동일지도 모른다.
결국 삶ㆍ생활에서 시작하지 않는 문과는 무의미하다.
놀랍게도 여러 고통의 원인들은 또한 고통이라는 점에서 관통된다.
그래서 꼭 빈곤을 알아야만 정치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정의를 내세우는 것보다 차라리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더 나을수도 있다.
그래서 많이 아는 것 못지 않게 모름을 인정하고 나아가 들으려는 자세가 위정자 등의 자격요건 중 하나가 된다.
관심 어린 모름의 인정은 작은 목소리를 듣는 근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