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한 변론
[박은 : 정치에 입문하고 제대로 실천해오진 못했으나, 그래도 난 바른 정치는 거래나 흥정이 아니라 설득이라 믿어왔네. 설득을 위해서는 말이야... 바보들이 즐겨 쓰는 방식이 좋을 수도 있어. 상대에게 진심을 주는 거지. 누가 뭐라고 해도, 자넨 평생 내가 가장 아껴 온 휘하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난 자네와 협잡이 아닌 정치를 하고 싶었네.
조말생 : .. 끝까지 절 모욕하시는군요.
박은 : .... 우리가 잘해온 건, 맞나?
(박은을 지나쳐 가다가 뒤돌아 흘끗 보는 조말생. 그리고 조말생의 회상.)
박은 :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 맞나? .. 역도란 놈, 눈빛이 참으로 당당하더구만. (쓴웃음) 이 천하의 박은이 잠시 기가 질렸어.
조말생 : ... 대감.
박은 : ...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
조말생 :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에요.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요.
(다시 현재. 빈청에 앉아 생각에 잠긴 조말생.)
_ KBS 드라마 <대왕세종> 51회 中]
차별금지법에 대해 사람들이 참으로 쉽게 말한다.
위에 제시한 장면처럼,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도 소수자 인권 입법에 대해서는 ‘소수자 인권 증진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이라는 조건이 꼭 따라 붙는다.
정작 그 구체적인 대안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고 관심도 없다.
인권문제의 제일 큰 비극 중 하나는 그 문제가 인본적, 실존적 차원의 절박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게는 당사자성이 전혀 없고 추상적 편견으로 접근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동정’과 ‘공감’의 차이이다.
그러나 일단 성소수자와의 접촉 경험만 있더라도 목사의 동성애 설교에 대한 수용도부터 달라진다는 점은 이미 연구로도 나와 있다(강신재 and 조은미. (2025). 개신교인은 목사의 동성애 설교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성소수자 접촉 경험과 목회자 권위 인식의 상반된 영향. 사회과학논집, 56(1), 27-48.).
만약 차별금지법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이라고 보는지를 밝혀야 ‘소수자 인권 증진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
제21대 국회에서 장혜영 정의당 의원 주도로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의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권과 차별금지에 관한 현행법 중 기본이 되는 일반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이다. 차별금지법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의 특별법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법상의 차별금지사유를 보다 구체화하고 의미와 판단기준을 명확히 한다.
2.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금지사유로 고용,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과 이용, 교육과 직업훈련, 행정서비스 이용 등 제반 사회경제적 대우에서 분리, 구별, 제한, 배제, 거부 등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규제한다.
3. 간접차별과 차별금지사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나 차별의 표시 및 조장 광고 행위를 규제한다.
4. 정부와 국가인권위원회는 차별시정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며 이행 결과를 공개한다.
5. 차별 피해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고, 인권위는 차별구제를 위한 시정권고를 받은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3천만 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6. 사안이 중대한 경우 위원회는 피해자의 소송을 지원할 수 있다.
7. 법원이 피해자의 청구에 따라 차별중지 등 시정 조치와 손해배상 등의 판결을 할 수 있다.
8. 차별행위의 악의성(고의성, 지속성, 반복성, 보복성, 피해 규모, 피해 내용 등 종합적 고려)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손해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이 가능하다.
9.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의 상대방이 (차별행위의 부재 내지 합리적 이유) 입증책임을 부담한다. 단 이는 제3장 즉 제반 사회경제적 대우에서의 불리한 차별의 발생 시에 적용한다.
내 생각으로 해당 법안에서 제일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위반 시 제재의 강도이다.
차별금지법의 ‘금지’라는 표현은 언뜻 들으면 형사법적인 인상을 준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차별‘규제’법이라고 봄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제재의 차원에서 볼 때의 차별금지법의 성격은 행정법으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강화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는 시정권고, 징계권고 등에 이행강제를 담보하는 행정상 규제 수단이 마땅치 않다.
벌칙이 있기는 한데,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옹호 업무 방해 등에 대한 처벌 규정이다. (즉 행정상 강제 수단이 아니라 형사처벌 규정)
차별금지법안에도 벌칙이 있기는 한데, 이것은 차별행위 자체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당사자의 소 제기 등에 대한 보복 조치 등에 대한 것이다.
그 외에는 기본적으로 차별금지법안에서는 인권위에 형벌이 아닌 행정벌 즉 행정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제적 제재 수단으로서의 이행강제금을 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 차별을 판단할 기준을 명확히 함으로써 역으로 자의적 사유로 차별을 판단하지 않도록 규제하였으며, 동시에 차별금지 사유에 해당하더라도 이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사유를 함께 규정하고 피진정인에게 의견제출권 등을 보장한다.
그 외에도 차별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법원의 징벌적 손해배상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다.
나는 제도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문화와 별도로 인권이라는 규범적 요청에 따른 최소한의 구제 수단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쟁점이 되고있는 성소수자 인권에 관하여서는, 차별금지법 반대론자들은 한편으로는 추상적 자유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성소수자 혐오로 비칠 수 있는 극단적 사례를 들고 와서는 자신들이 ‘성소수자 인권 증진에 반하는 것은 아니’며, ‘차별금지법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대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동의한다.
해외의 많은 선진국들은 일단 동성혼을 법제화하여 민사적 권리와 사적 자치를 보장한 후에 동성 커플의 입양을 보장하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사(私)에서 공(公)의 차원으로 나아갔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성소수자 관련 입법이 전무한 상황인데, 차별금지법은 공(公)에서 사(私)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일본에서 최근에 가결된 성소수자이해증진법도 비슷한 맥락이지만 단지 선언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달리 인권 입법을 조금이라도 논의할 동기가 별로 없는 자민당이 그런 입법이라도 했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봄 직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별금지법 반대론자들이 실제로 표현의 자유라던가 하는 명분 뒤에 숨어서는 혐오를 자행하거나 인권문제의 본질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추상적인 이념적 주장만을 내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정체성 논쟁이 사회적으로 과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이나 지향성 등으로 인하여 차별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인권의 요청은 문명국이라면 부정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싫어할 자유’가 ‘자신의 인격을 유지할 자유’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전환치료(Conversion therapy)의 실패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실존적, 생존적 차원으로까지 침투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에 비한다면 동성애를 거부한다는 개인의 신념을 표면적으로 규제받는 것이 그렇게까지 강한 보호를 받을 법익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