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현실주의자들에 대한 변론
*참고한 논문) 허태구. (2021). 광해군 대 박승종(朴承宗)의 정치적 위상과 대외인식. 한국학연구, 60, 241-276.
*참고한 서적) 정민ㆍ이홍식. (2017). 한국산문선 4. 민음사.
목숨을 걸고라도 의리가 먼저라는 주장이 도그마가 된 조선시대의 사정은 짜증스럽다.
그것이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은 아니다.
아름답고 올바르기는 하지만, 지배적인 규범화가 되면 현실적인 처신이나 논의를 가로막는다.
예컨대 장유가 전한의 소하가 고제(유방)의 의심을 회피하기 위해 농사를 지으며 야심 없음을 보인 것을 두고 군주를 속인 것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지었는데, 솔직히 공감하기 어렵다.
물론 군주가 어떤 마음이건, 심지어 잘못된 길을 간다면 신하는 목숨을 걸고 직언함이 도리임은 맞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당시 상황과 소하 본인의 입장에서 고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지도 있다.
또 기본적으로 신하가 군주에게 보일 의리도 있겠으나 군주가 신하에게 보일 의리도 있는 것인데, 경우에 따라 고제가 그러한 신뢰를 주지 않은 것이라면 소하의 처신도 비난할 것까지는 아니다.
이는 개인의 처신만이 아니라 조정의 의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요동에서 명과 후금이 충돌하는 상황에 명이 (황제의 칙명은 아니었으나) 파병을 요청한 데 대한 대응 논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비변사의 압도적 다수의견은 심지어 정적이었던 대북의 이이첨과 소북의 유희분을 막론하고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파병 찬성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임진왜란 전후 복구기였고,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많이 약화된 상태에 야전 등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다.
논문에 따르면 조정 중론도 이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중화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그러한 주장을 한 것이라 하는데, 이는 분석상으로는 이해가 가능할지 몰라도 평가상으로는 도리어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다. (현실적 조건을 알면서도 그런 주장을 한다는 건 더 심각하다.)
광해군의 결론은 파병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중론을 하는 대신들을 직언한다는 허명을 얻으려 국가와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는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타당한 평가가 아닌가?
명이 후금을 확실히 압박할 수 있거나 최소한 호각이라면 모르더라도, 명은 불리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기초적인 전력과 전략도 부실했으며 이를 조선 조정도 모르지 않았다.
이는 강홍립의 파병 때 결국 집단 자살한 유정 등의 행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승종을 대신한 아들 박자흥 등의 의견은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의 전력이 약한데 후금의 전력은 너무 강하고 우리가 국경의 병력 배치를 증강해 후금이 우리를 걱정해 명과의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게만 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라는 것이었고 왕도 이에 동감했다.
후금이 후에 국서를 보내왔을 때 이에 대해 답할지의 여부를 논할 때 박승종이 영의정으로서 비변사를 책임졌고 왕이 그 사안을 총괄토록 하였는데, 박승종은 답서를 보낸다고 할 때 그 뜻이 명이나 후금의 불만을 사면 결국 우리에게 화가 닥치므로 신중해야 하며 선뜻 후금과 화친하려는 뜻을 보이면 남송의 진회와 같은 간신으로 자신을 몰아붙일 것이니 곤란하다는 취지로 아뢰었다.
악비를 추앙하고 진회를 경멸하는 것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심했고, 조금이라도 화친의 기미가 보이는 주장을 하는 것은 왕에게 아부나 하고 구차한 목숨이나 연명해 보자는 처신으로 폄훼되었다.
이러한 파병 논의와 답서 논의에 있어서의 박승종 등 소수파에 대한 (서인) 사관의 평가는 가관이다.
박승종이 처음에 두 가지 선택지를 왕에게 제시해 놓고 정작 왕이 답을 헤아려 정하라는 명을 내리자 다시 그것이 어려움을 아뢰니 왕에게 허물을 미루고 자신은 욕을 들을까 발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뒤엎은 서인들이 일방적으로 정권 핵심이었던 박승종의 의도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것이라 본다.
어차피 결정권자는 왕이니 재상이라 하더라도 권신처럼 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신중론의 입장을 다시 내어 좀 더 생각해 보시라는 것이 그 자체로 그렇게 타당하지 않은 의견도 아니다.
박승종은 최명길과는 달리 주화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지 않았고, 진회와 비견되는 평가를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무릇 경세가라면 명분론과 현실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고, 박승종이나 최명길이 특별히 명분론을 부인한 것도 아니다.
과거에 학교 도서관 깊숙이 있던 최명길의 문집 <지천집>을 보았는데, 그의 취지도 박승종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요는 우리의 군사력이 약한데 국경이나 주요 요충지에 체계적으로 병력을 배치하고 보강하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후금이 명을 더욱 압박해 나갔고 더욱 전세가 기울어 갔기에 최명길은 말로만 척화를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점을 역설했고 나아가 불가피하게 주화하게 되었다.
붕당 간 의견 대립이 극심했음에도 정작 핵심 정책 사안에서는 어느 붕당도 지배적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도그마를 현실적인 정책 논의에 직결시키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