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이 글의 요지는 ‘종교가 동성애자를 억압해서는 안 되고, 종교로 하여금 소수자 권리의 수용을 천명하도록 강제해서도 안 된다.’라는 점이다.
이는 정교분리를 말 그대로 이행함으로써 얻는 ‘분리를 통한 조화’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 글에서는 나의 신앙과 이성에 대한 기본적 태도, 신앙의 영역에서 소수자 정확히는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 소수자 운동과 이성의 영역에서 신앙에 대한 태도, 동성애자의 권리 보호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신앙과 이성에 대한 기본적 태도
기본적으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며 신앙에 대해 점차 긍정적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신앙과 이성 또는 철학은 구태여 연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해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으며, 믿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서 믿을 수 있다.
어느 것이건 가능하다.
구태여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거나 믿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입증할 실익은 크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컨대 철학자는 가톨릭 신앙을 지니면서도 그와 분리된 철학이라는 학문적 장에서는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다.
신앙 자체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될 소지도 있겠으나, 전체 사회와 인생의 차원에서 보면 그 간극을 좁혀가거나 좁히는 것을 포기하는 것 또한 개인의 결단에 속하며 거기에 대해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다.
신앙은 오직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 존재 의의와 나아가서는 본인의 신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예컨대 인생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거친 사람은 한가하게(?) 신의 존재니 하는 사변적인 담론 없이도 실존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신앙의 여부를 고민할 수 있다.
본인이 어느 모로 보나 신은 존재한다거나, 반대로 어느 모로 보나 신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양극의 결론을 내리는 건 학문적 차원에서나 유의미할 것이다.
실제로는 그 사이의 모호한 영역에서 개인은 신앙을 가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이성의 차원에서 무신론이건 유신론이건 불가지론이건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신이 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이것이 감정의 도피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여 좀 더 고민할 뿐이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그냥 분리해서 보아도 괜찮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신앙이 동성애자를 보는 태도와 사회와 공공이 신앙의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를 보는 태도
좀 더 정확히 말해 나는 신앙 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입교를 고민해왔다.
그런데 내 신념상으로는 가톨릭의 동성애 죄악론은 수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이 동성애를 수용한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교분리의 원리로 다시 돌아가면, 가톨릭은 국교가 아니며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전체 사회가 동성애를 수용한다손 치더라도 가톨릭이 동성애를 수용해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으며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예컨대, 구체적으로 올바른 가톨릭 신자가 구태여 동성애를 고해성사의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면 그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에게 동성애에 대한 가장 좋은 태도는 ‘전략적 침묵’이 아닐까 한다.
물론 가톨릭은 사회윤리, 성윤리와 불가분이며 어떤 식으로든 그 문제를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요소 하나 때문에 모든 면에서 올바른 신자를 받아들이지 못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지점 때문에 프란치스코 선대 교황이 매우 조심스럽게 그 자체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한 사람으로서 대하자는 차원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예전 미국의 DADT(Don’t Ask, Don’t Tell) 원리 같은 것을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있다.
그렇다고 아예 동성애에 관한 언급조차 금지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적어도 전체 가톨릭의 입장은 미지수로 남겨두고 개별 성당에서는 보편적 포용의 차원 정도로 접근하는 것이 제일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요점은 맨 처음에 밝혔듯, 신앙에 동성애자의 포용을 강제할 것은 아니며 또한 반대로 신앙도 한 인간으로서의 차원에서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정도가 어떻겠느냐는 생각이다.
동성애자의 권리 보호에 대한 대안
기본적으로 우리 민법은 명문상으로는 혼인의 주체가 ‘남녀’라는 점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종래까지 불문율로서 혼인의 주체는 남녀라는 점을 인용해 동성커플의 혼인신고를 불수리해왔을 따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행정소송 차원에서 용감하게 단지 해석론이라는 이유로 동성커플의 혼인신고 불수리는 적법하지 않다고 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재판소원금지와 앞서 밝힌 민법 명문상으로 혼인의 주체가 남녀라고 규정하진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헌법재판을 통해서도 구제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입법을 통해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생활동반자법과 같은 준혼인제도를 적용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편인데, 실질적으로 볼 때 결국 그러한 제도가 동성혼의 최종적인 법제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혼인과 큰 차이가 없는 제도라면 그냥 혼인을 인정하면 간단할 것이 아닌가 라고 보기 때문이다.
민법과 가족관계등록법 등에 따르면 혼인의 성립요건은 형식적 요건으로서 혼인신고, 실질적 요건으로서 a) 혼인적령에 달하였을 것 + b) 부모 등의 동의를 얻을 것 + c) 일정한 근친자가 아닐 것 + d) 중혼이 아닐 것 + e)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것이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성립요건 중 당연히 동성혼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볼 만한 것은 없다.
다만 교과서(by 김주수&김상용)에 따르면, 혼인의사란 일반적으로 부부로서 정신적-육체적으로 결합하여 생활공동체를 형성할 의사를 의미하는데 육체적 관계의 의사 즉 동거의 의사가 부재한다면 혼인의사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동성 간의 혼인의사를 유효한 혼인의사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나는 친족법 과목을 수강할 때 이에 대해 의문이 생겼지만 결국 질문을 하지 못했다.
내가 독해한 바가 맞다면, 동성 간 혼인의사가 유효하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동성 간에는 동거 즉 육체적 결합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의사야 주관적인 것이므로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객관적으로 육체적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동성 간 혼인의사는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혼인이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몰라도, ‘본질적으로 동성 간에 육체적 결합이 성립하지 않으므로’라는 논거는 그 자체로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육체적 결합 또는 구체적으로 성관계가 동성 간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볼 수 있는가?
성관계는 생물학적인 현상인데, 분명 자연에서도 동성의 동물 간 성행위가 관찰되고 있다.
성관계가 본질적으로 생식을 위한 행위라고 정의하기 때문일 가능성도 상당한데, 방금 제시한 부분을 보면 반드시 자연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성 간이건 이성 간이건, 인간이건 인간 외 동물이건 간에 동성 간 육체적 관계는 성립하며 또한 관찰된다.
그렇다면 동성 간에는 육체적 관계가 불성립하기 때문에 주관적 의사와 무관하게 동거 의사가 성립할 수 없고 따라서 혼인의 성립요건 충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법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다시 현대사회의 상식의 관점에서 보면 동성혼은 종래의 종교나 그에 기초한 전통으로부터 전래된 ‘혼인은 본질적으로 남녀 간의 관계’라는 주장과 ‘혼인은 단지 인간과 사회의 행위 또는 현상의 하나일 뿐이며 성의 다름 여부는 무관’이라는 주장 간의 대립일 뿐이다.
이제는 전자가 상식이라기보다 ‘주장’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법은 단지 하나의 주장에 기초해 해석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종래의 상식이 본질적으로 혼인은 남녀 간의 관계라고 보기 때문이라는 논거는 이제는 단지 일부 신앙에서의 하나의 주장을 국가가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는 정교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동성혼 법제화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합의가 필요하다는 건 구체적으로 ‘개신교와 가톨릭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혼인은 민사상 개인들의 자유로운 신분관계 형성 의사의 합치라는 점과 공공 차원의 의사가 단지 하나의 종교에 의하여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사회적 합의론’은 수용하기 어렵다.
개신교도 가톨릭도 모두 국교가 아니며,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다 합친다 해도 절대다수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신자 모두가 동성혼에 무조건 반대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은 다수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진보 진영에서는 차별금지법을 강하게 관련 의제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선후 관계의 차원에서 의문이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법안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보면 예컨대 동성애에 대한 종교의 거부 의사를 규제한다기보다는 공공서비스나 고용 등의 차원에서 성적 지향성 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경우의 구체적 구제 절차와 행정벌 등을 규정한 ‘구체적 인권구제법’에 가깝다.
다만 이 법안 옹호론의 일각이 상정하고 있는 논리처럼 이 법안을 통해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성혼 법제화로 나아간다는 발상은 별로 현실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우선 우리나라가 해외와 같이 성적 지향성 자체가 이슈가 되어 주택의 매매나 전세 계약을 거부한다던지 하는 이슈를 맞닥뜨린 적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물론 예컨대 직장에서 아웃팅을 당한다던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보호가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보통 동성혼을 법제화한 많은 나라들은 평등을 본위로 자유로 나아간다기 보다는 자유를 본위로 평등으로 나아갔다.
즉 평등은 ‘자유를 모두가 차별 없이 누린다’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더 쉽게 말하면, 동성 간 혼인의 법제화라는 개인 간 민사적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우선이고 그러한 커플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의 구제가 수순이라는 의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했듯 개인의 자유와 권리로서의 동성혼을 법제화하되 종교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우선되고 그 다음에 그들의 사회경제적 재화와 서비스 제공에서의 차별 등 대우의 불평등에 대한 구제 문제를 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동성혼을 법제화한 서구 선진국들도 이런 수순으로 입법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만약 차별금지법을 가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백래시와 혐오 만연의 촉매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일반사회의 직관적 관점에서 볼때에도, ‘혼인은 동성애자에게도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보다는 ‘내가 수용할 것인지와는 별개로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라는 마지노선이 일단은 더 타당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다.
결론
나의 요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사적 자치와 정교분리라는 매우 단순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신앙과 이성, 그리고 권리는 서로 분리되어 각자의 차원에서 자신의 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
신앙이 특정 권리를 반대한다고 하여 그것을 들어주는 것도, 특정 권리의 차원에서 신앙에게 수용을 강요하는 것도 모두 반대한다.
설령 갈등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상태의 갈등인가에 따라 타당성의 차이는 있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상황은 다소 불균등하며 또한 불합리하게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측면이 있다.
서로에 대한 건강한 거리두기로 이러한 침범을 적절히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다.